[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6.10.6 (화)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사 메일전송  기사 출력  기사스크랩
 //www.joyseattle.com/news/64205
발행일: 2026/07/30  조이시애틀뉴스
[레지나 칼럼] 꿈은 이뤄진다 (2)

아침 일찍 다운타운 사무실로 출근했다. 사무실에서 다섯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다 보면, 추위를 피해 지난밤 셸터에서 지내다가 새벽 5시면 밖으로 나와야 하는 노숙인들이 건물 입구 구석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모여 있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건물 현관 앞에서 새벽 술을 마시며 추위를 견디는 그들의 모습은 하루도 빠짐없이 마주하는 풍경이었다.

20여 년 동안 같은 사무실로 출근하다 보니, 약에 취했거나 아침 해장술에 취한 중독자들이 길을 걷는 나에게 시비를 걸거나 희롱하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면 신기하게도 우리 사무실에서 도움을 받던 노숙인이나 중독자 고객들이 어디선가 달려와 나를 감싸주곤 했다.

"헤이! 돈 허트 마이 시스터(우리 누나를 괴롭히지 마)!", "쉬 이즈 아워 시스터(She is our sister)."라며 나를 보호하듯 막아서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도 내 사무실까지 함께 걸어다 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성경 말씀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는 구절을 삶 속에서 직접 경험하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하지만 늘 만나는 사람들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고, 냄새나고 악취가 나는 환경 속에서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자신도 그 분위기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무렵 친하게 지내던 백인 친구가 캘리포니아에서 특별한 디자인의 옷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독특한 컬러와 디자인으로 주문 제작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가격도 상당해서 쉽게 살 수 없는 옷들이 많았다.

피카소 그림을 연상시키는 프린트의 레깅스, 한쪽 어깨가 드러나는 A라인 드레스, 독특한 디자인의 재킷, 헐렁한 린넨 세트까지…. "이 옷은 어디서 샀어요?"라는 질문을 절로 듣게 만드는 옷들이었다.

친구는 자신이 만든 옷 가운데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들을 여러 벌 선물로 보내주며 말했다.

"네가 정말 좋아할 옷들이야."

직장에서 만나는 지저분한 환경과 고객들의 모습에 지쳐 있던 나에게 화려한 색감과 특별한 디자인의 옷들은 잊고 지냈던 예술 감각을 다시 깨워주었다. 내 삶에도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가 보내준 옷들을 나만의 스타일로 소화하며 나만의 패션을 만들어 갔다. 그렇게 냄새나는 직장생활도 즐겁게 견뎌낼 수 있었다.

어느새 우리 사무실 직원들과 정신질환을 앓는 고객들 사이에서 나는 '시애틀의 패셔니스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내가 매일 입고 오는 옷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내가 출근하면 리셉셔니스트는 물론, 대기하고 있던 고객들, 함께 일하던 하버뷰 병원의 젊은 의사들까지 하나같이 말했다.

"레지나, 땡큐 포 웨어링 브라이트 컬러스(Thank you for wearing bright colors)!"

내가 입은 밝은 색의 옷을 보면 자신들의 마음까지 환해지는 것 같다고 모두들 행복해했다.

나는 특별한 옷을 입는 사람이었다. 우리 직원들에게도, 정신적으로 힘든 고객들에게도 나는 밝은 색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활력을 전해주는 패셔니스타였던 것이다.

두 달 전, 나에게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온라인에서 내 사진을 보았는데 옷차림이 특별하고 친근한 인상이어서 자신들이 찾는 시니어 모델과 잘 맞는 것 같다며 사진 열 장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요즘 워낙 사기가 많다 보니 '에이, 이것도 스캠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디어 레지나, 당신은 우리가 찾고 있는 시니어 모델에 꼭 맞는 사람입니다. 꼭 사진을 보내주세요."

은퇴한 뒤 회사와 계약을 맺고 집에서 몇 개의 케이스를 맡아 일하고 있던 나는 시간적인 여유도 있었고, 워낙 부지런한 성격이라 남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모델 회사에서 원하는 특별한 사진 열 장을 보내고 2주쯤 지났을까.

이메일이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뉴욕 패션쇼 참가자 심사에서 현재 당신의 사진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순간 혼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음… 이제 패션스타 한번 되어볼까?'

그렇게 혼자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한 달쯤 지나 다시 이메일이 왔다.

사실 그 한 달 동안 내 마음은 이미 런웨이 모델이 되어 있었다.

다시 심사를 해야 하니 사진 다섯 장을 새로 찍어 보내고, 색조화장을 한 사진도 함께 제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평소 립스틱 하나만 바르고 다니던 내가 색조화장을 어디서 배우나 고민하다가, 다운타운 시애틀을 배경으로 사진을 멋지게 찍어 다시 보냈다.

사진을 보내고 2주가 흐르는 동안 내 마음은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그리고 어제 또 이메일이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오는 9월 패션쇼에서 가장 먼저 런웨이를 걷게 되었습니다."

정말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곧이어 또 다른 이메일이 도착했다.

"레지나, 런웨이에 서려면 투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내는 링크를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공유해 주세요. 매일 투표를 많이 받을수록 런웨이 자리가 확정됩니다. 한 번 투표할 때마다 최소 25달러에서 최대 1,000달러까지 후원금을 낼 수 있습니다."

그 이메일을 읽는 순간 나는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댐잇(Damn it)!"



레지나 채
소셜워커, 워싱턴가정상담소 소장
이메일: regina.chae3@gmail.com 

 

<저작권자 ⓒ 조이시애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l   About Us   l   기사제보   l   개인정보보호정책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