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꿈이랄까. 늘 멋진 그림이나 특별한 컬러, 독특한 디자인으로 자신을 꾸미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가던 길을 멈춰 서서 한참 바라보곤 했다. 아마 내가 아홉 살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함께 가던 엄마나 아버지는 그런 나를 잡아끌며 "애가 아직 쬐끄만한데 저런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말씀하시곤 했고, 내 손을 잡아 다시 길을 재촉하셨다.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딸이었던 나에게는 조금 더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주실 수도 있었겠지만, 부모님이 특별히 나만 더 잘해주셨다는 기억은 별로 없다. 부모님은 모든 자녀를 평등하게 대하며 우리를 키우셨다.
점점 자라면서 나는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었다. 학교 미술 시간에는 미술 선생님의 관심도 많이 받았고, 미술 쪽으로 나가면 성공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 시절 미술대학에 진학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미대를 가려면 재능은 물론이고, 유명한 교수나 화가에게 개인 지도를 받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부모님께서는 "미술로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계셨다. 그림은 취미로 하고 다른 공부에 힘쓰라며 "아자아자! 힘내자!"라고 격려하셨지만, 내 예술에 대한 꿈은 그렇게 꺾이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단식투쟁도 하고, 심통도 부리고, 가족들과 거리를 두며 시위를 벌인 끝에 결국 엄마의 굳게 닫힌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그렇게 유명한 동양화가의 화실에 다니게 되었지만, 학교와 화실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매일 화실에 다니는 일은 어린 나에게 쉽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다니던 화실에서 나는 그림보다 라면을 더 많이 끓이고 있었다. 선배 언니, 오빠들이 "맛있는 라면 좀 끓여 달라"고 부탁하면, 나는 거절을 못 하고 용돈까지 써가며 계란과 파를 사다가 석유곤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을 끓여 바쳤다.
매일 내 옷에서 라면 냄새가 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엄마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화실을 찾아오셨고, 그 장면을 직접 보셨다. 결국 엄마는 그날로 나를 화실에서 그만두게 하셨다. 그렇게 7개월 만에 나의 화실 생활은 끝이 났다.
엄마는 "아이고, 저 애들이 너를 이용하는 거야. 비싼 수업료를 내줬더니 그림은 안 그리고 라면만 끓이고 있느냐"고 크게 화를 내셨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도 나는 요리하는 일이 참 재미있었다. 비록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만든 음식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했다.
그날 이후 그림과의 인연은 끊어졌지만, 나는 어디를 가든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는 늘 앞장서고 사람들을 이끌곤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문득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되돌아보니, 어느새 경력을 갖춘 크리니컬 카운슬러가 되어 있었다. 크리니컬 카운슬러로 일한 시간만 24년이었고, 그 이전과 이후를 포함하면 10여 년 동안 노인복지와 가정폭력 방지 프로그램에서도 상담사로 일했다.
사회복지 상담사로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일을 아주 잘한다는 칭찬도 많이 받았다.
고객 한 사람이 사무실을 찾아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면, 내 머릿속에는 그 사람의 미래를 위한 계획이 마치 설계도를 그리듯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그 청사진을 따라 필요한 부분을 하나씩 도와주다 보면 대부분의 사례가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 회사에서 30년 동안 사회복지사로 일한 경험은 내 삶의 시야를 더욱 넓혀주었다. 직장 안에서의 일뿐 아니라 직장 밖에서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에도 더욱 힘을 쏟게 되었다.
30여 년 동안 정말 조용히 지역사회 곳곳에서 도움이 필요한 일들을 찾아다니며 내 에너지를 쏟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조금만 더 신경 쓰고 발품을 팔면 그들이 자립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은 나에게 큰 행복감과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1,000여 명의 직원 가운데 한국인은 우리 사무실 인턴이었던 앤디 송(현재 정신과 교수, 당시 렌턴 시의원 후보)을 제외하면 나 혼자였다.
미국 직장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의외로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회복지 분야는 사람을 돕는 일을 하는 직업인 만큼 인종차별이나 사람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거의 없었다.
나는 한국인의 근면함을 최대한 발휘하며 성실하게 일했다. 중독자와 노숙인, 정신질환자들을 상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복지 혜택을 찾아주는 일은 나의 적성에도 잘 맞았고, 무엇보다 보람 있는 일이었다.
약물에 취해 비틀거리던 사람들, 1년이고 2년이고 씻지 않아 상상하기 어려운 냄새를 풍기며 내 사무실 문을 열고 "짠" 하고 들어오던 고객들….
그들에게 나는 단순한 상담사가 아니라, 삶을 다시 이어갈 수 있도록 붙잡아 주는 생명줄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소셜워커, 워싱턴가정상담소 소장
이메일: regina.chae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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