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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8/06/21  조이시애틀뉴스
[서울통신] '폭 안기는 기분이 들어요~'


남한산성에 다녀왔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에 있으며 같은 이름의 소설(2007)과 영화(2017)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이란 문화재가 다소 멀리 느껴졌었는데, 지하철 노선을 보고 조금만 신경 써서 교통편을 한 번만 잘 갈아타면 산성입구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남한산성이 현대 극영화에서 데이트하는 장소로 나오기도 했고, 점점 수도권 명소로 가까이 자리매김을 하는 느낌이 있던 터에 한 선배님의 방문 감상이 필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한산성 좋아요~ 터가 뭐랄까, 그러니까 그곳에 성곽을 쌓았겠지만, 폭 안기는 기분이 들어요~’ 그 선배님이 유리문 통해 보이는 마주 편 돌담 위 기왓장을 바라보면서, ‘저 작은 기와지붕으로도 사계절이 느껴져요.’라고 말할 때, 필자도 이제 남한산성을 더는 ‘말로만 듣고 가보지 않은 또 하나의 장소’로 남기고 싶지 않아졌다.


남한산성 경내(境內)에 도착했을 때 순간 당혹스러웠던 것은 꼬불꼬불 에스 자 형의 가파른 산길을 올라 진입로에 도착했는데, 그 종점은 산길이 아니라 탁 트인 평지의 아스팔트 교차로라는 것이다. 이곳이 해발 320m라는 데 서울 남산의 정상이 262m이니 산성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탁 트인 공간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시야에 각종 안내판과 방문자센터, 버스정류장, 주차장, 그리고 다양한 식당과 카페가 그득하다. 건너편에는 연결도로, 편의점, 또 식당들, 관공서, 초등학교, 교회, 은행 등이 있다. 산속의 외진 유적지인 줄 만 알았는데 의외로 행정력이 탄탄하게 미치는 정착된 동네로서의 안정감이 느껴졌다.



방문목적이 남한산성을 구경하러 온 것이니 방문자안내소로 갔다. 팸플릿을 받고 우선 남한산성의 동서남북의 성문, 그리고 안내소에서 가까운 천주교 순교성지로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어보니 일본인 여성이었다. 그때부터 내 속은 버걱거렸다.


한국의 문화재안내소에 일본사람이 한국인에게 길을 안내해야 하는가? 사실 이런 문제는 서울의 관광안내소에서도 맞닥뜨린 적이 있다. 왜 꼭 외국인이 한국의 관광 안내를 해야 하는가? 한국인이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관광 안내소에 외국인의 상주 문제는 한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홍보, 그리고 국내 관광 요원의 고용창출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남한산성은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11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고 있으며 본성은 인조 2년 (1624)에 통일신라시대 주장성(晝長城)의 성 돌을 기초로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행궁은 별도 팸플릿이 있는데, 행궁이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인조 14년 (1636) 후금의 청 태종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 인조는 이곳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왔다. 인조는 47일간 후금 [청]과 싸우다 결국 남한산성의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三田渡, 현재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행궁은 1907년 일제가 조선 군대 해산령을 내리고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파괴하면서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2002년 복원을 시작하여 2012년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행궁의 정문은 한남루인데, 이 누각을 받쳤던 돌기둥이 수십 년간 인근 초등학교 정문의 돌기둥으로 쓰이다, 학교와 동문들의 협조로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행궁은 2007년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다.


남한산성은 19세기 말까지 300년간 성 안팎 인구 약 4000여 명을 안정되게 유지한 곳으로 구한말 의병운동이 이곳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1930년대에는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917년 광주 군청을 산성 안에서 경안 (현 광주 시내)로 이전하면서 점차 인구도 감소하고 한적한 산촌으로 변화해갔다. 이후 1963년 국가 사적 제57호로, 1971년 도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14년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지역 축성술의 교류를 잘 보여주는 초대형 군사 유산이라는 점과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시대별 축성술의 변화를 집약했다는 점 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재되었다.


많은 방문객이 버스를 타고 혹은 승용차를 타고 등산복으로 차림으로 친구들, 가족들과 남한산성의 탐방을 즐긴다. 행궁을 들어가 보니, 서울의 고궁들과 비교하면 규모는 작으나 왕의 거처인 만큼 대궐의 양식과 분위기를 지녔으며 전체적으로는 아담하고 오밀조밀하다. 산악지형 속 궁궐 안 층계는 유난히 가파르다. 돌아보면 멀지 않은 시야에 산이 둘러져 보이고 행궁의 분위기는 신선하면서도 아늑하였다. 아마 임금도 서울 대궐에서는 최고 권력자의 권력과 위엄을 누렸다면 이곳 행궁에서는 사람의 행복과 평화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산성은 더는 벽지의 남한산성이 아니었다. 편리한 교통과 많은 음식점, 각종 편의시설과 옛사람의 유적들, 그리고 천혜의 지형과 한국의 축복인 좋은 물은 남한산성에도 지금도 여전히 마르지 않고 전역을 적시고 있다.


동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만난 카페의 여주인 말로는 오전에 오면 조용한 데 정말 좋다고 한번 아침에 일찍 와서 연못을 끼고 걸어보라고 권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이래저래 적어도 2시간을 투자해야 이곳에 올 수 있는데 과연 이 별세상에 성큼 다시 올 수 있을까! 카페 주인과의 대화가 재미있어서 한번 그렇게 해보고 싶긴 했는데 너무 휴가에 빠져드는 것 같아 좀 망설였다.


이것을 해도 저것을 해도 시간은 가고 터는 남는다. 일상을 떠나 과거나 현재의 상상력이나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지만, 과거의 교훈을 현재에 어떻게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면에서는 어떤 시대이든 같은 문제와 사람들과의 복잡 다난한 갈등 앞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한 후 포로로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이 60만이라고 하니 난리를 겪은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척박했을 것인가. 복원된 행궁의 임금이 머물었던 방을 구경하며 그 시절을 돌아보는 지금의 안전과 평화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고생스러운 삶 위에 이루어진 것인가 숙연해지기만 한다.




 

 

신순영

조이시애틀뉴스 서울통신원

고려대 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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