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새벽 공기가 차가워서 숨을 들이키면 찬 공기가 가슴에 걸린 듯 숨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입고 있던 코트의 옷깃을 세워 입을 가리고 겨우 숨을 쉬어 보니, 찬 새벽 공기가 옷깃에 한 번 걸러져서 그런지 숨 쉬는 것이 그나마 조금은 편안해졌다.
아니, 어쩌면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던 것은 밖의 기온이 차가워서가 아니라 벌써 00씨가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숨쉬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것 같다.
새벽 5시경,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자마자 정신없이 옷을 챙겨 입고 빠른 속도로 운전을 해 이곳 병원까지 차를 몰았다. 시애틀에서 타코마 샌프란시스 병원에 도착하니 하늘에는 이제 새벽 동이 막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병원은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인지 주위가 고요하고 적막감이 감돌았다.
나는 병원 입구에 서서 3일 전 방문했었던 00씨의 병실을 찾아가려 했는데 문득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생각이 잠시 멈춰 버렸다.
그러자 00씨의 병실이 어디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그 자리에서 멈춰 서 있었다.
마침 아침 일찍 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려던 직원을 보고 다가가 00씨가 입원해 있는 병동과 병실을 묻자 그 직원은 자기가 새벽에 00씨를 살펴보았다고 하면서 병실을 알려주었다.
00씨가 입원해 있는 병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니 이미 간호사와 담당 의사, 그리고 직원 한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00씨 앞으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내가 00씨가 누워 있는 병원 침대 앞에 서자 의식이 없어 보였던 00씨의 고개가 잠시 움직이려는 듯하더니 이내 푹 떨어지듯 고개가 숙여졌다.
“00씨, 저 레지나 왔어요. 눈을 떠보셔야지요. 00씨, 레지나 채 왔습니다. 한 번 눈을 떠보세요…” 몇 번이고 불러 보았지만 잠시 후, 00씨는 어렵게 숨을 조금 몰아쉬는 듯하더니 곧 고개가 힘없이 수그러졌다.
나는 다시 한 번 00씨의 이름을 부르며, “00씨, 레지나 채입니다. 00씨, 레지나 채가 왔어요.” 하고 연거푸 불러 보았다. 어쩌면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정신이 있을 때 00씨를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00씨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20여 년간 거리를 혼자 헤매며 외롭고 슬프게 살아온 00씨의 마지막 가는 길에 무엇인가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어야 했는데. 그냥 이렇게만 살다가 혼자 쓸쓸히 떠나는 00씨를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파 어떤 위로가 될 만한 말이라도 해주었어야 했는데 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나는 이미 숨이 끊어진 00씨의 몸을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아, 00씨. 저하고 약속한 빨간색 컨버터블 차는 사주시고 가셔야지요. 약속을 지키시고 떠나셔야지요. 지금 이렇게 가시면 안 되지요!”
얼마 동안을 펑펑 눈물을 쏟으며 이미 삶의 끈을 놓아버린 00씨를 껴안고 있는데 곁에 서 있던 간호사가 나를 00씨에게서 떼어 놓고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간호사의 품에 안겨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나를 안아주는 간호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00씨가 나를 처음 만나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 내가 아시안 카운셀링 센터에서 노인복지 담당자로 근무할 때였다.
아시안 카운셀링 사무실에서 내가 하던 일은 주로 연세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한 각종 베네핏을 찾아드리고 잘 알지 못해 어려워하시는 서류 작업을 도와드리는 일이었다.
보통 한국 어르신들은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실 때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오시는 편이었지만 00씨는 사무실 로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늘 입은 옷이 다 헤어졌거나 오랫동안 같은 옷을 입어 곳곳에 때가 많이 묻어 있었고 역한 냄새도 심하게 났다. 그래서인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00씨가 앉은 자리 옆에는 웬만하면 앉으려 하지 않으셨다.
내가 아시안 카운셀링에서 킹 카운티 프로그램으로 이직한 후 몇 달이 지나 어느 날, 우리 사무실 프런트 앞에서 누군가 소란을 피워 사무실에서 로비로 나가 보니 00씨가 프런트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프런트 직원에게 애를 먹이고 있는 00씨를 향해 “00씨, 여기에 웬일이세요?” 하고 묻자 프런트 직원에게 엉뚱한 요구를 하던 00씨는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발견하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이구, 레지나 씨가 나를 좋아하나 봐. 나만 따라다니네!”
내가 이 새로운 사무실로 오기 전부터 00씨는 이미 이곳 사무실의 환자 고객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나는 00씨를 담당하던 직원에게 내가 한국말을 하니 00씨 케이스를 나에게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날 이후로 00씨는 내 담당 케이스가 되었다. (계속)
소셜워커, 워싱턴가정상담소 소장
이메일: regina.chae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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