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프로그램의 '위해 감소 프로그램(Harm Reduction program)'은 잘 모르는 분들이 “왜 쓸데없이 정신질환자들이나 중독자들을 보호하면서 막대한 돈을 쓰느냐”고 묻곤 한다.
“우리 이민자들은 말도 못 하지, 돈도 없지, 환경도 전혀 다른 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아끼고 또 아껴가며 사는데, 혼자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왜 도와줘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내 대답은 언제나 같다. “좀 더 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물론 이 대답이 이분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대로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지식도, 지혜도, 이성도 갖추고 있지만 대부분의 정신질환 고객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중독자가 된 고객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자주 없다.
“왜 그걸 우리가 책임져야 하느냐”고 묻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길을 함께 걸어가며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은, 온전히 건강한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럭키이다. 한 번뿐인 인생길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아니 삶의 길에 함께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들을 돕는 일은 끝이 없는 길이다.
웬만큼 상식적인 마음상태여야 기대도 하고 희망도 갖지만, 우리 고객들에게는 기대도 희망도 잘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메인테인해주며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역할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
우리 프로그램에 들어오면 코케인을 여전히 사용하는 고객들도 있고, 술을 계속 마시는 고객들도 있다. 하지만 하우징 케이스 매니저들은 이들이 마구 복용하도록 놔두지 않고, 약을 줄여가도록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는 방법을 알려주며 권면해주고, 이들의 생명을 아껴주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아침과 점심은 든든히 먹여주면서…
전화 메시지에 낯선 목소리의 고객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이제야 누군지 생각이 났다. 퀸앤 지역 저소득층 아파트에 입주해 있는 나의 예쁜 할머니 고객(67세) 000이다.
000는 반년 전, 나라에서 받는 혜택이 1280불로 웰페어보다 많았는데, 65세가 되면서 받던 메디케어가 끊기자 우리 사무실에서 상담과 의사 진료를 받으려면 본인이 매달 돈을 내야 했다. 그러나 돈을 낼 수 없다며 발길을 끊었던 고객이었다.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반가워하며, 다시 우리 사무실에서 상담을 받고 싶다며 방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나는 고객의 인컴을 확인한 후, 웰페어를 받는 금액 이상의 부분은 spend down으로 사용할 수 있고, 그러고 나면 메디케어 커버를 다시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니, 옆방에 사는 정신 나간 여자가(사실 내 고객도 정신질환이 있다) 내 고객이 옆방에 들어간 적도 없는데 “들어왔다”고 우기며 찾아와 머리채를 잡고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매니저가 경찰을 불러 그 옆집 여자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는데, 앞으로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하냐면서 레지나가 도와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는 “우리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사무실 인테이크 스페셜리스트와 상담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나를 찾아오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고객이 지금 어려운 상황이니 법적인 도움을 받을 길을 먼저 찾아주었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흐르고 말았다.
이들과 함께 생활해온 지도 오랜 시간이 되었다. 무엇이 나를 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 불편하지 않게 하는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라온 환경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가 어릴 적,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여 보내고, 돈을 구걸하는 사람에게는 주머니를 열어 잔돈이라도 쥐여주셨으며, 헐벗고 추운 이들에게는 아버지나 오빠들의 헌옷이라도 입혀 보내셨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에게서 보고 들은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내 전화 메시지의 고객은 물건들에 대한 집착이 병의 증상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거의 우울증이 함께 오기도 한다. 그 고객의 원베드룸 아파트에 방문하면 작은 방 안이 그야말로 미로처럼 되어 있어 지나가기조차 힘들다. 크고 작은 물건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발뒤꿈치를 들고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한다.
집안 곳곳엔 온갖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안 입는 옷더미가 왜 그리 많은지, 옷장 문조차 열리지 않는다. 부엌 싱크대에는 그릇과 음식물들이 층을 이루며 쌓여 있고, 냉장고 깊숙한 곳의 음식들은 오래되어 곰팡이가 피어 있기도 했다.
나는 이 고객을 이 쓰레기 더미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객에게는 물건 하나하나가 의미와 이유가 있어서 버릴 수 없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손목에 채워졌던 인포메이션 팔찌만 해도 40여 개가 넘게 매달려 있다. “저것들을 왜 버리지 않느냐”고 물으면, 언제 왜 병원에 입원했는지를 ‘기념하고 싶어서’란다.
물건에 대한 집착증은 어떤 상처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허전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무의식적으로 먹을 것을 찾듯, 이 고객은 허전함과 외로움 때문에 물건을 모으며 집착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허기진 사람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듯, 물건을 들여놓고 쌓아두어도 외로움과 허전함, 상처는 채워지지 않는다.
이 고객의 어릴 적 환경은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손에서 구박받으며 자란 데다, 오빠와 함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며 생긴 병이기도 하다. 물건이 없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 늘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무언가가 쌓여 있는 그 공간은, 누군가가 없어도 ‘있어주는 것들’이기에 모든 물건이 의미 있다.
정신과 치료와 상담을 통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이 고객은 세상에 혼자다. 하나뿐인 오빠는 원양어선에서 일하다 다쳐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더 외롭다.
한참을 고객과 이야기하다가 마지막 말이 나를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레지나는 나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거 알지!”
지난겨울,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 '위해 감소 프로그램'이라는 우리 사무실 프로그램을 소개하며 강의할 일이 있었다. 그동안 일해온 여러 사례를 들며 설명하니 강의를 듣던 분들은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며 열심히 들어주셨다.
조금 속상했던 것은, 나는 한국말을 아주 잘한다고 생각하며 강의 준비를 해갔는데, 막상 강의를 시작하니 적절한 표현이 잘 떠오르지 않아 많이 힘들었다. 아무래도 미국 생활이 한국에서보다 길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날 감동이었던 것은, 몇 시간에 걸친 강의를 90분마다 쉬어가며 진행했는데, 도중에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한국 민요에 ‘쾌지나 칭칭나네’가 있는데, 레지나 선생님 강의를 듣다 보니 꼭 말씀드리고 싶다”며 ‘쾌지나 칭칭나네’를 ‘레지나 칭칭나네’로 바꿔 부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교실 안의 모든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지나 칭칭나네’라고 바꿔 부르며 한참 동안 나의 일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해주었다.
2020년도 어려웠던 코비드의 시간도 지나가고 있다. 지금까지 크게 아프지 않고, 필요한 이들에게 작은 것이라도 내밀며 함께 걸어올 수 있어서 감사한 2020년이다.
앞으로도 나는 더욱더 함께 걸어가는 삶 속에서 ‘레지나 칭칭나네!’ 신나게 노래 부르며 걸어갈 것이다.
소셜워커, 워싱턴가정상담소 소장
이메일: regina.chae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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