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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10/27  조이시애틀뉴스
[칼럼] 시애틀 가을 아침, ‘아랑훼즈 협주곡’ ...이동근

며칠 전 아침, 아내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데 유튜브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아랑훼즈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 제2악장 아다지오(Adagio)였다. 평소에도 즐겨 듣던 곡이지만, 이날은 몇 차례나 반복해서 들으며 그 선율을 음미했다. 유튜브에서 소개하는 곡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처음 듣는 내용으로 그 사연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기 때문이다.

▲가로수에 붉은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시애틀의 가을 풍경 © 이동근
 
이 곡은 스페인의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가 1939년에 발표한 유명한 클래식 기타 협주곡이다. 특히 제2악장에는 아내 빅토리아의 첫 아이 유산으로 인한 고통과 절망, 그리고 ‘신과 나누는 대화’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작곡가가 시각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마드리드 남쪽에 있는 아랑훼즈 왕궁의 아름다운 정원을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아내의 설명과 자연의 소리, 바람의 감촉 등을 통해 그 풍경을 마음속에 그렸다고 한다.

그 상상과 감정을 이토록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로 표현했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애절하면서도 슬프고, 때로는 절규하고 부르짖는 듯한 선율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아내 빅토리아가 유산 후 합병증으로 위독해졌을 때, 하나님께 아내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로드리고의 절규와 간절한 기도가 음악 속에 담겨 있는 듯했다.

잉글리시 호른의 애절한 선율과 기타의 독주가 마치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마음을 전하는 듯했다. 그 감미로운 멜로디를 듣고 또 들었다.

시각장애인 남편을 위해 헌신한 아내의 사랑과 희생에 오래전 친분을 맺었던 고 강영우 전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와 아내 석은옥 여사의 헌신적인 사랑도 다시 떠올랐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겨 낸 두 부부의 이야기가 음악 속에서 겹쳐졌다.

고통 중에 있고 위독한 아내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로드리고처럼 나의 경우도 벌써 26년 전 아내가 유방암으로 진단받았을 때 사랑하는 아내가 병마를 이겨내고 다시 건강을 되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그때의 심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음악을 듣던 내내 그때의 간절했던 기도와 그 기도에 응답해주셨던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다시 감사를 올린다.

다행히 하나님은 로드리고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의 아내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고 이후 부부는 두 번째는 딸을 무사히 출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애틀의 늦가을 아침, 은퇴 전 신문사에 일했을 때라면 데드라인으로 가장 바쁜 시간이지만 이젠 건강한 아내와 아름다운 음악과 커피 향 가득한 시간 속에서 가을을 엮어 갈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화려하게 붉은 가을 단풍 풍경들의 화면 속에 애잔하고도 격정적인 선율을 감상하다보니 짙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더 느끼게 한다.

이미 시애틀의 주변 산들은 물론이고 도심의 가로수들도 노랗고 붉은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

그러나 절정의 단풍을 즐기기도 전에 10월 마지막 주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맑고 따뜻했던 가을 날씨가 어제부터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며 기온도 내려가 집안 난방도 열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뭇잎들이 도로 위에 수북이 떨어져 쌓이고 밟히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구르몽의 시 ‘낙엽’을 읊으며 바스락 소리 내는 그 낙엽을 밟고 간다.

더구나 11월이 되면 미국의 서머타임이 해제되면서 저녁이 더 길어진다.

교회에 오가는 길도 어두워지고, 차가운 비가 내리는 날이 잦아지며 점점 추워질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리고 어두운 날들이 이어지면 우울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한인들도 늘어나지 않을까 염려된다.

하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궂은 날씨를 미리 걱정하기보다는, 아름다웠던 이번 가을에 감사하며 좋은 추억들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싶다.

올해 시애틀의 가을은 유난히 비 오지 않고 맑은 날이 많았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10월 초부터 하순까지 시애틀에 내린 누적 강수량은 약 0.08인치에 불과했다. 이는 1987년 10월의 0.05인치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적은 강수량이라고 한다. 시애틀이 ‘비의 도시’(Rain City)'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맑고 건조한 날들이 이어졌다.

뒤돌아보니 이번 가을에는 장거리 여행을 떠나지는 못했지만, 멀지않은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냈다.

스카지트 벨리에 가서는 넓게 펼쳐진 호박밭에 들어가 호박을 고르고 사과도 직접 따는 기쁨을 누렸다.

▲스카지트 벨리 한 호박농장의 커다란 호박 앞에서 © 이동근

해마다 라 코너 인근 I-5 고속도로 주변에서는 갓 수확한 싱싱한 옥수수를 살 수 있는 기쁨도 있는데 예전에 1달러에 10개하던 것이 이젠 2개밖에 되지 않아 이곳에서도 치솟는 개스 값과 함께 생활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레이크 스티븐스에 있는 최순동 장로님의 ‘만나 농장’을 방문했던 날도 기억에 남는다. 넓은 농장에 배추와 무를 비롯한 각종 한국식 야채와 농작물들을 가꿔주셔서 한국인들의 밥상을 제공해 주시는 고마운 분들이다.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싱싱하게 자란 깻잎과 고추를 풍성하게 따올 수 있었다.

어느 날은 공원에서 낙엽을 밟으며 아내와 함께 릴케의 시 ‘가을날’을 이야기하며 걷다가 문득 벤치에 새겨진 아리스토텔레스의 글귀를 발견했다.

“Nature does nothing uselessly.” “자연은 쓸모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깊이 공감했다. 자연의 모든 것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한 의미와 역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날에는 페리가 바다를 가로질러 오가는 에드몬즈 바닷가를 걸은 후 카페에 들려 잠시 커피를 마시며 전시된 예술작품들을 감상했다. 추운 바다에서 수영하는 여성들도 있어 놀랐지만 푸른 바다는 항상 우리에게 비전을 보여주는 멋이 있는 곳이다.

큰아들은 강에서 낚시로 연어보다 잡기 어려운 커다란 스틸헤드(Steelhead)를 잡았다며 자랑했고, 예쁜 손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쁨도 누렸다. 둘째 아들도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기게 된 행복한 10월이었다.

여름 내내 아내가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가꾼 무화과나무에서는 가을이 되자 갑자기 커지고 맛좋은 열매가 풍성하게 열렸다. 수확한 무화과를 이웃들과 나누며 함께 기뻐할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이었다.

10월에는 교회 선교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밤과 사과를 판매했다. 주변 농장에서는 배가 풍년을 맞았고, 깊은 산속에서도 송이버섯이 제철이라고 우리 식탁에도 송이버섯 요리가 풍성하게 올랐다.

가을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비바람에 떨어진 낙엽은 길 위에 쌓이고, 나무에는 빈 가지가 하나둘 더 드러날 것이다. 파란 하늘과 찬란한 햇빛이 빛나던 시애틀의 아름다운 가을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앞으로 밤은 더 길어지고, 날씨는 더 어둡고 더 추워질 것이다. 비와 바람뿐 아니라 눈이 내리는 겨울도 머지않아 벌써 이번 주 밤 기온이 영하 가까이 내려간다는 저녁뉴스가 화제이다.

날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도 여러 가지 불확실성과 어려움으로 어두워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각지에서는 시위와 폭력 사태가 계속 번지고 있고 위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몇 년 전 유럽 여행 중 관광객들로 붐비던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 광장이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인근의 명품 상점들이 약탈당하는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그곳은 2020년 펜데믹 기간 때에 유명 시각장애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가 텅 빈 성당 앞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외로울 정도로 홀로 불렀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성당에서 울려 퍼지던 그의 노래는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 있던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했다.

그토록 감동적인 노래가 울려 퍼졌던 곳에서 이제 폭력과 혼란의 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 역시 물가 상승과 생활비 부담으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개스 값을 비롯한 여러 생활비가 오르면 평범한 가정의 살림살이도 더욱 팍팍해진다.

이처럼 우리 삶에도 앞으로 춥고 어두운 겨울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어려운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하루하루에 충실하면서 우리 곁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행복을 발견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비 오고 추워지는 11월이 되면 시애틀 지역의 강들에는 산란을 위해 상류로 올라오는 연어들이 나타난다.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의 모습을 보면 생명의 강인함에 감탄하게 된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수 만 마리의 스노우 구스(Snow Goose)들이 스카짓 벨리의 넓은 평야에 모여드는 장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철새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들판에 내려앉는 모습은 추운 날에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11월에는 또한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이 기다리고 있다. 온 가족과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함께하는 소중한 날이다.

깊어 가는 가을 아침, 커피향 속에서 감미로운 선율을 감상하다 보니 음악에 푹 빠져 지냈던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그토록 음악과 문학과 예술에 열정적이었던 시절이 어느새 지나갔다는 사실에 아쉬움과 그리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익어가는 삶을 가꾸며 새로운 세계의 열매를 맺어 감은 이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며칠 전 월동 준비로 정원의 시든 꽃들을 정리하다 보니 봄과 여름 아름다웠던 꽃들도 지는 것을 보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사40:8) 말씀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계절이 바뀌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인생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음악을 즐길 수 있고, 아름다운 선율과 이야기에 감동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마음이 메마르지 않고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인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육신은 나이가 들면서 쇠약해지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말씀 묵상하며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시선과 임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코람데오(Coram Deo)’ 의 신앙생활을 이어 갈 때, 우리의 속사람은 더욱 단단하게 익어가며 강건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4:16)

그 믿음만 있다면 춥고 어둡고 비와 눈이 내리는 겨울 날씨도, 불확실한 현실의 어려움도 넉넉하게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침에 비가 내렸던 어제도 기쁜 일이 있었다. 지난 시즌 수퍼볼 우승을 차지했던 시애틀 ‘시학스’가 이번 시즌에는 부진해 아쉬움을 주었는데, 어제 경기에서는 무패 행진의 캔자스시티 ‘치프스’를 크게 이겨 응원하던 가족들에게도 기쁨을 주었다.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주변의 작은 것에서도 행복과 기쁨을 발견하고, 이웃들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눈다면 암울한 세상의 현실과 비 오고 춥고 어두운 날씨도 조금은 더 잘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비가 그친 어느 오후, 햇살이 반짝이는 뒷마당을 보니 여러 마리의 새들이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다람쥐 두 마리는 울타리와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뛰놀고 있었다.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그 모습이 그림처럼 남는다.

감사하게도 올해는 두 분의 자서전 집필을 도울 기회가 있었다.

두 분 모두 89세의 고령이시다. 그중 한 분은 신윤식 전 오리건 한인회장님이다. 몸이 아픈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혼 61년 만에『영희와 윤식의 영원한 사랑』이라는 책을 펴내게 되었다. 오랜 세월 함께한 아내에게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또 다른 한 분은 미국생활 56년동안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어려운 삶을 살아오셨다. 워싱턴주 시골에 살면서 외롭고 힘든 삶을 사셨지만 놀랍게도 그분의 자서전은 ‘고마웠습니다, 나의 90년 인생’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특히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오셨지만, 아흔을 앞둔 지금은 지나온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신다.

그분의 이야기를 대필하면서 나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의 삶에도 비 많이 내리고 바람이 불며 추운 겨울이 찾아올 수 있다. 세상은 불확실하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인생이 내일의 일을 다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이 마음을 위로하듯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어려운 재정 문제로 현재 섬기고 있는 ‘시애틀 뉴비전교회’가 내년 3월이면 작은 성전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현재의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떠나는 것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교회는 아름다운 건물이나 화려한 시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믿기에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새 역사와 은혜를 주실까 기대하고 기도하고 있다.

시애틀의 가을 아침,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들었던 ‘아랑훼즈 협주곡’의 애절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도 작은 것에 감사하고,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다.

계절은 바뀌고 세월은 흘러가지만, 사랑과 감사와 믿음의 선율은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이동근 (전 중앙일보 시애틀지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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