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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4/10/22  조이시애틀뉴스
[기획특집] 서북미 한인사회 뿌리를 찾아서(1) ... 하와이서 건너와 새둥지

서북미 첫 온라인신문 조이시애틀뉴스는 한국언론진흥재단(KPF)의 후원으로 '서북미 한인사회 뿌리를 찾아서' 특집 기사를 기획했다. 특별취재팀이 현장취재를 통해 오리건주, 스포켄, 시애틀-타코마 지역의 한인 이민사를 집중 조명하는 기사를 모두 5회에 걸쳐 시리즈로 게재한다. <편집자주>

 

오리건주 한인 이민사의 산증인으로 60년 넘게 그레샴에 거주하고 있는 박락순 여사.

 

오리건주 최대의 한인사회가 포틀랜드에 형성돼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오리건주에서 가장 오래된 포틀랜드 동쪽의 그레샴에서 태동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구 11만의 도시 그레샴은 사실상 한국 이민자들이 워싱턴주를 포함한 서북미 전역에서 최초로 농장을 운영하며 둥지를 튼 곳이다.


조이시애틀뉴스 취재팀이 확인한 기록에 따르면 1911년 2월 윤병구 목사가 하와이를 거쳐 그레샴에 도착, 채소농사를 지으며 한동안 살다가 자녀들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후 타주로 이주했다.


윤 목사의  채소농장을 인수하기 위해 부모와 함께 이민 온 김성옥씨가 오리건주에서 일생을 마친 실질적인 한인 이민자 1호인 셈이다.  평북 용천 출신의 김성옥씨와 부인 이채봉(평양 출신)씨는 1911년 와이오밍주에서 오리건주로 이주해 왔다. 


역시 하와이에서 와이오밍을 잠시 거쳐 오리건주로 이주해온 김씨 가족은 그레샴에서 윤 목사 농장 구입에 실패하자 세일럼으로 옮겨 그곳에서 양파 등을 재배하는 54에이커 규모의 농장을 운영했다.

 

김씨가 68년 사망한데 이어 부인 이채봉씨도 77년에 사망, 이들의 유산은 모교인 숭의학원, 포틀랜드 한인장로교회, 오리건한인회 등에 기증됐다.

 

초기 오리건주 한인 이민자들의 모습. (출처: 회보 '태평양')


사탕수수 농부 33명중 일부
철도 일 찾다가 그레샴 정착


'한국 이민자-커뮤니티 생활 및 사회적응' 이라는 논문으로 오리건대학(UofO)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경숙 그레고(한국명 조경숙) 여사는 그레샴 한인사회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것은 1942~52년의 10년 사이였다고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20세기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 본토의 철도공사 일자리를 찾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33명의 한인 가운데 일부가 그레샴으로 올라와 정착, 한인사회를 형성했다.


당시 한인들은 커뮤니티를 형성, 백인사회와 간헐적으로 접촉을 했으나 선진 이민그룹이었던 일본인 커뮤니티와는 전혀 접촉이 없었다고 그레고 여사는 말했다.


그레고 여사는 당시 한국이 일제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레샴 거주 한인들은 본국과도 전혀 연락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해방 후 미국 내 각 도시의 한인사회가 전반적으로 조직을 강화하는 추세를 보였지만 그레샴은 한인사회의 주축이었던 이민 1세가 급격히 줄면서 오리건주 한인사회의 중심이 포틀랜드 쪽으로 옮겨갔다.

 

1928년 박경수씨가 그레샴 농장에서 채소를 재배하기 위해 밭을 일구는 모습. (박락순 여사 제공)


생물학도가 농사꾼으로
49년 유학 온 박락순씨


오리건주 초기 이민자 가운데 지금까지 그레샴에 살고 있는 박락순(85)씨는 서울대학교 생물학과 재학 중 유학, 포틀랜드대학에 입학했으나 생물학과는 여학생의 등록을 불허 여학생이 지원할 수 있는 간호학과에 들어갔다. 당시에 이 대학에는 한국 남학생 2명도 있었다고 말했다. 가까스로 간호학과에는 입학했으나 공부가 어려워 1년여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박씨는 한국전쟁으로 서울에서 보내오던 송금이 끊기자 취업에 나섰다. 당시 유학생은 일하다 적발될 경우에는 즉각 추방당했으나 박씨는 한국이 전시인 탓에 추방을 면하는 행운(?)을 얻었다.


박씨는 23세에 2세인 해리 박 씨와 결혼, 그레샴에서 '박스 묘목원(Park's Nursery)'를 함께 운영하며 지금까지 60년이 넘게 그곳에 살고 있다. 부군 박씨의 부친 박경수씨는 1905년에 이민왔다.


당시 한국 이민자들은 상상하기 힘든 고생을 했다고 회고한 박 여사는 하와이에서 몬타나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겨울에는 맹추위로 문을 못여는 상황에 처했으나 해방후 살기 좋다는 오리건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박 여사는 남편은 47년에 아이다호주로 왔고 자신은 49년에 왔다고 말했다.  51년에 결혼을 했으나 당시는 고국의 부모의 생사확인조차 어려웠다는 것.

 

일제시대에 오리건으로 이민온 한국인이 소지하고 있던 일본여권. (박락순 여사 제공)


그레샴 지역 한인들은 50년대 총 260에이커에 달하는 경작지에서 양파, 브로컬리, 오이, 양상추 등 각종 채소를 재배하며 전성기를 이뤘다.  

 

당시 오리건 한인사회는 이미 2세 중심으로 영어가 일상 언어였으나 60년대 이후 본국 유학생들이 오면서 한국말을 하는 한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박 여사는 자신이 유학온 49년 당시에는 영어시험(TOEFL)도 없었고 미국 내 거주자의 재정지원만 확보하면 유학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1917년 사진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시집온 고모 정난숙씨의 보증으로 유학온 박 여사는 당시에 한인은 그레샴에 10가구, 포틀랜드에 서너 가정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기획특집 2편에서 계속)

 

박락순 여사 가족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는 그레샴의 박씨 묘목원.

박락순 여사가 그레샴 농장에서 텃밭을 일궈 한국 고추, 호박 등을 재배하고 있다.

그레샴 농장에서 재배한 고추를 말리고 있는 모습.

박락순-해리 박 부부가 1950년대초에 첫 아들과 함께 찍은 단란한 모습. (박락순 여사 제공)

오리건 한인사회의 첫 회보 '태평양'

 

포틀랜드/그레샴=김정태 기자, 닉 권 사진전문기자


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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