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나는 제 사무실에 들어섰습니다. 온몸이 축 처져 있어서 젖은 옷처럼 늘어진 듯 보였습니다.
얼굴은 차가운 바람에 오래 노출돼서인지 빨갛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신발은 비에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주며 말했습니다.
“이런 날씨엔 굳이 내 사무실까지 오지 않아도 되잖아?” 온몸이 젖은 채 추위에 떨던 비비안나는 내 품에 살며시 안기더니 씩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오늘 우리 약속이 있잖아요!”
비비안나는 우직할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지 벌써
6년 가까이 되어 갑니다. 많은 가정폭력 피해자이자 노숙인들을 만나 상담했지만,
비비안나처럼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실천하며 꿋꿋하게 나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처음 그녀가 우리 프로그램에 왔을 때, 담당자가 된 나는 여러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비비안나는 아무 표정 없이 짧게 대답만 할 뿐이었습니다. 얼굴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고, 앉은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녀의 카운슬러가 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우연히 우리 프로그램에서 계획에 없던 영구 임대 타운하우스,
방 두 개짜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비비안나가 입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에 살던 사람이 마약을 상습 복용하다가 강제 퇴거를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비비안나는 시애틀 다운타운의 여성 보호소에 있었고,
아들 리키는 청소년 보호소에서 엄마와 함께 살 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키는 13살, 동그란 눈에 훤칠한 키를 가진 잘생긴 소년이었습니다.
비비안나는 새집으로 이사했지만, 집 안에는 가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굿윌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레이첼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레이첼, 또 한 번 천사가 되어 줄래요?” 그러면 레이첼은 늘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레지나, 당신이 천사라면 나는 천사의 상사지요!”
며칠 뒤,
나는 지인의 트럭을 빌려 남자 노숙자 몇 명에게 부탁해
Goodwill에서 가구와 집기를 가져와 그녀의 집을 꾸며 주었습니다. 비록 헌 가구였지만 쓸 만한 것들이었고,
방이 채워지니 한결 포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날, 평소 거의 말이 없던 비비안나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었습니다. “레지나, 저 수채화 물감 좀 가질 수 있을까요?” 나는 잘못 알아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습니다.
“뭐가 필요하다고요? 수채화 물감이요?” 몇 번을 묻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됐어요.” 나는 부드럽게 다시 물었습니다. “비비안나,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하지만 그녀는 입을 꼭 다문 채 더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나서는데 리키가 뒤따라 나와 말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수채화 물감을 갖고 싶어 해요. 혹시 구해 줄 수 있나요?”
다음 주,
나는 비비안나를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한국에서 돌아온 지인이 선물해 준 수채화 물감 한 통과 큰 도화지 세트를 건넸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는지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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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워커, 워싱턴가정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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