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왕따’, ‘학폭’, ‘이지매’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시대가 달라지고 이름도 바뀌었지만, 사람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제법 오래된 학교폭력의 경험자다. 그것도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말이다.
우리 집에는 여섯 남매가 있었다. 첫째인 언니는 얌전하고 조신하며 공부도 잘하는,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아이였다.
그런데 둘째인 나는 조금 달랐다.
어른들에게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했고, 궁금한 것은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당돌한 아이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말썽꾸러기는 아니었다. 숙제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고, 개근상도 받았다. 학교 대표로 동화대회와 웅변대회, 영어회화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 오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그런 나를 예뻐하셨다.
다만 체육시간만큼은 예외였다. 왜소한 체구로 농구와 배구, 달리기까지 잘할 재주는 없었다. 세상이 공평하다면 내게 운동신경만큼은 넉넉히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여섯 남매 중 내가 가장 마음이 착한 아이였다고 한다.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기를 좋아했고, 시골에서는 할머니 몰래 찾아오는 걸인들에게 쌀을 퍼 주었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렇게 착하고 공부도 잘했다는 아이가 어쩌다 왕따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여섯 아이를 키우기 벅찼던 어머니는 그중 하나를 시골 할아버지 댁에 보내기로 하셨다. 동생들이 조금 더 자라면 다시 함께 살기로 하고, 그 영광스러운 대표 선수로 내가 선발되었다.
어머니는 멀리 떠나는 딸을 예쁘게 꾸며 주셨다.
당시에는 제법 고급이었던 빨간 앙고라 스웨터에 짧은 치마를 입히고, 머리에는 온갖 머리핀을 꽂아 주셨다. 책가방을 등에 메고 신발주머니까지 갖추었으니 어린 내 눈에도 제법 근사한 차림이었다.
그렇게 나는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골 아이들에게 나는 그야말로 구경거리였다.
“와, 이상하게 생겼다!”
“머 이렇노?”
“서울내기네!”
아이들은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빨간 앙고라 스웨터에 머리핀까지 꽂은 서울내기는 그 동네에서 꽤 눈에 띄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낯선 사투리와 낯선 얼굴들 속에서 나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무슨 말만 하면 “서울내기!” 하고 놀려 댔으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마음 편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선생님들은 나를 동화반과 기계체조반 등 특별활동에 참여시켰다. 동화대회에서 일등을 하여 영한사전과 배드민턴 라켓, 공책 같은 상품을 받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나를 알아보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어느 날 하굣길, 같은 반 여학생 서너 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키가 나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그중 한 아이가 말했다.
“이가시나는 다마내기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말리기는커녕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듯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날 하루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아이의 눈에 띄기만 하면 맞았다. 때로는 머리카락까지 잡아당겼다. 무엇을 빼앗으려는 것도,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밉다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이 예뻐하는 서울내기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맞고도 참았다. 그러나 그런 날이 반복되자 학교에 가는 것조차 무서워졌다.
하굣길에는 할아버지 댁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있었다. 나는 그 언덕에 주저앉아 울곤 했다.
“엄마…… 엄마…….”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마당에 높이 서 있는 감나무 꼭대기에 올라갔다.
할아버지 댁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대나무 울타리 안에는 감나무와 모과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배나무가 가득했다.
그중 가장 높은 감나무에 올라앉으면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노래 속에 서울 이야기가 나오면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났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감나무 위에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그곳은 어린 나만의 피난처였다.
학년이 바뀌면서 나를 괴롭히던 여학생에게서 겨우 벗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네 남자아이들이 문제였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아이들은 장난이라며 돌을 던졌다. 꼭 맞히려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놀림을 받는 내 마음까지 장난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언덕에 앉아 울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는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나 보다. 그러니까 여섯 아이 중 나만 이렇게 먼 곳에 떼어 놓으셨겠지.’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의 사정도 이해할 수 있다. 여섯 남매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렇게 시골에서 3년을 보낸 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시골 마을을 다시 찾은 적이 있다.
문득 나를 그토록 괴롭히던 아이가 생각났다.
“그때 그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오래전 무서운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토록 무섭고 공포스러운 존재였는데, 막상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미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 아이는 왜 나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지금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사람은 때로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을 미워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수많은 갈등과 암투를 마주해야 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그 경험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미리 보여 준 작은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른다.
화살처럼 지나간 세월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미움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을 때도 있다. 때로는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편견과 반목이 생기고, 그것이 갈등과 상처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은 또 다른 사실도 가르쳐 주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내가 달라져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미움이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감나무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어린 소녀가 아니다. 그때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깊고 넓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소나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바닷물의 짠맛이 사라지지 않듯, 누군가의 미움이 내 마음의 본질까지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가시를 세우는 사람도 있고,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가시 때문에 나까지 가시를 품고 살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도 가끔 빨간 앙고라 스웨터를 입고 낯선 시골길을 걷던 어린 소녀가 생각난다.
그 시절 그 아이에게 이제는 말해 주고 싶다.
“네가 미움을 받았다고 해서 네게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란다. 그러니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된다고.”
힐릭스부동산 대표
전 평통 시애틀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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