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보이스메일에 잘 기억나지 않는 전화번호와 낯선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일단 모든 보이스메일을 확인한 뒤, 중요도 순으로 전화를 돌려 답장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가장 우선되는 일은, 우리를 직접 만나는 고객들의 신변 문제나 건강 상태에 관한 사항들이다.
개인 카운슬러마다 28개에서 40여 개의 케이스가 할당되어 있는데, 맡은 고객 중 중증 환자가 많으면 그만큼 도와야 할 케이스의 수가 줄어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증인 고객일수록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증 고객들은 대부분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거나, 정신적 장애로 인해 혼자서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많은 경우 망상증, 조울증, 심한 우울증 등을 앓고 있어 혼자 두어서는 안 되는 상태다.
물론 약물 중독으로 인해 뇌 기능에 문제가 생겨 정신 질환이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뿐 아니라, 유전적 정신 질환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의 돌봄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결국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도 있다. 혹은 가족이 보호하려 애써도 병의 특성상 스스로 떠돌다 홈리스가 되어버린 경우도 많다.
우리 프로그램은 이런 사람들을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신념 아래 운영된다. 약물 중독이든, 정신적 지체든 관계없이 이들에게 집과 옷, 음식 등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모든 카운슬러가 최선을 다한다.
나 또한 동료들과 함께 이들에게 최대한의 관심을 가지고 도우려 노력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같은 일을 하며 버티는 우리 동료들이 자랑스럽고, 늘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거리에서 몸이 불편하거나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을 보면 피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못된 아이들은 긴 막대기로 그들을 괴롭히거나 해코지하기도 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지금의 한국은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전했으니, 그런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 믿고 싶다.
지난해 겨울, 한국의 두 대학에서 우리 프로그램에 대한 강연 요청을 받아 방문했다. 그곳에서 ‘위해감축(Harm Reduction)’ 프로그램을 소개했는데, 학생들은 “아직 한국에서는 먼 이야기 같다”며 미국의 복지 시스템을 부러워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위해감축 프로그램은 약물 중독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동시에 대중의 안전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우선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안전한 집을 제공하고, 먹을 것을 지원하며, 약물로 인한 사고나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현재 우리 프로그램에는 14개의 하우징(공동 거주시설)이 있다. 각 하우징에는 50명에서 200명까지 생활하고 있으며, 각자의 방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하우징에는 이들을 관리하는 하우징 케이스 매니저가 상주하며, 주민 간의 사고를 예방하고, 부엌 스태프들이 식사를 제공한다.
각 방은 개인 공간으로 보호되며, 스태프들은 허락 없이 문을 열 수 없다. 나는 정신과 카운슬러로서 이들과 매주 한 번 사무실에서 상담을 진행하고, 필요한 지원을 점검한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이들이 사는 방을 직접 방문해 생활 상태를 확인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이 직원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들이 사는 방은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어떤 방은 길거리 쓰레기장을 옮겨놓은 듯하고, 또 어떤 방은 고장 난 자전거가 여러 대 쌓여 누울 자리조차 없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이 때문에 가정 방문 시에는 마치 병원에서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덧입는 보호복을 입고, 신발 위에 덧신을 신은 채 방을 방문한다.
방문을 하면,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방도 있다. 하우징 매니저들은 이런 방을 찾아내 청소 대행업체를 불러 청소를 시키지만,
너무 지저분해서 대부분의 업체가 거부할 정도다. 결국 웃돈을 주면서까지 청소를 진행한다.
위생도 문제지만, 쓰레기가 쌓이면 화재나 안전사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청소를 마쳐도 3일 만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매니저들의 고충이 크다.
정신 질환이 있는 고객들은 누군가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면 격렬히 반발하기 때문에, 청소를 위해서는 경찰의 동행이 필요하기도 하다.
며칠 전, 매주 나를 찾아오던 아프리칸 아메리칸 고객 00씨가 사무실에 왔다. 그의 눈빛을 보니 약을 끊은 것 같아 물어보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약을 받아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말과 행동은 분명 약을 복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 그는 내 책상 위를 보며 “저 가방이 왜 여기 있냐”고 하더니, 내게 “가방을 열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건 내 가방”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내 가방이 확실하니 열어보라”고 고집했다. 그래서 백팩을 열어 노트북과 서류를 보여주자, 그는 “그건 내 것”이라 했다.
이후 나는 그 고객의 하우징 케이스 매니저에게 연락해 약 복용 상황을 확인했다. 매니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받아 간다”고 답했다. “정말 복용하는 걸 확인했느냐?”고 묻자, 그는 “직원들이 연말 휴가 중이라 일손이 부족해 직접 확인은 못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단호히 말했다. “오늘부터는 약을 그냥 건네주지 말고, 입에 넣는 것과 물을 마셔 삼키는 것까지 직접 확인하라.”
며칠 뒤 다시 만난 고객은 눈빛이 맑아져 있었고, 예전처럼 약을 꾸준히 복용할 때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이런 하루하루의 반복 속에서, 나는 또다시 다짐한다. 누군가의 회복을 돕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 한 사람의 눈빛이 돌아올 때 느끼는 그 따뜻한 희망의 순간 때문에 오늘도 나는 이 일을 계속한다.
소셜워커, 워싱턴가정상담소 소장
이메일: regina.chae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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