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썰미 좋은 누군가 외쳤다. ‘어머 우리 여자들 양말 색깔이 다 다르네’ 산장 벽난로 앞에 둘러 앉자 그림공부를 하며 수다를 풀던 그녀들은 바로 서로에 두발을 모야 각자의 다름을 뽐낸다. 부엌 앞 식탁에 모여 산행의 피로를 여유 있는 음주로 녹이던 사내들도 슬며시 제 발을 들어 처다 보지만 주는 대로 신어야 하는 양쪽 발은 회색 아니면 깜장 양말로 통일되어 있다. 신고 싶은 대로 신을 수 있는 것이 자유 라면 골라 주는 대로 신어야 하는 것은 구속이다. 우리는 양말을 꺼꾸로 뒤집어 벗어 버리는 찌질한 용기로 저항할 뿐이다.
은하수 가랑비에 젖듯이 눈 싸이는 산장은 하얀 도화지 위에 검은 점으로 젖어 들어갔다. 이미 4년째 해오고 있는 모임이다. 년 초에 산장을 찾아 하루 낮 밤을 함께하며 정을 나누고 신년을 계획한다. 지난해 스노퀄미패스 스키장 인근에 산장을 이용한 것 말고는 이번까지 세 번은 날이 좋으면 마운트 레이니어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애쉬포드 인근에 자연림 산장을 이용했다.
2020년 올해 신년모임은 그 중에 가장 편리시절이 잘 되어 있는 스노우볼헛에서 15명에 회원들이 함께 했다. 근래 드물게 눈이 엄청나게 쏟아져 산악스키도 타며 심 설 산행을 재미나게 하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산행 트레일 헤드가 노란 금줄 바리케이트와 플라스틱 붉은 안전 가림막으로 막힌지 한 달이 지나간다. 출입금지가 아니라 온 고을에 ‘금족령’이 내린 것이다. 그사이 하얀 겨울은 거무죽죽한 무니를 남기며 큰 산으로 들어가고 햇살은 옅은 홍차 색을 앞세워 봄을 데리고 야트막한 동산으로 나와 푸름과 노랑 보라를 수놓았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 됐다는 ‘코로나’는 보이지 않는 이상한 힘으로 큰 세상을 뒤집었다.
사태의 심각성으로 두문불출 하던 우리들은 따사한 봄 볕에 고사리 순이 너무 웃자랄까 근심하며 저마다의 산행 소망을 전화기에 담아 나르며 격리생활에 적응해 간다. 저 산 넘어 바깥으로 나 갈수 있는 것이 축복인 것을 알아채는 것은 순간이였다. 지난 산행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연이 내게 준 은혜에 감사하며 갈라먹던 귤 껍질 한 조각 이라도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 되돌아 올 것을 다짐하고 무심코 발 디뎠던 작은 수풀 하나라도 비껴서 지나칠걸 하며 늦은 후회도 한다.
벽난로가 지키는 산장의 밤은 정이 싸이고 수다가 쌓이고 용서가 쌓이고 눈이 쌓였다. 글의 말머리를 잡아가며 산에서 있은 슬픈 소식을 검색해 본다. ‘네팔 안나푸르나에서 한국인 교사 4인 눈사태로 실종’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더 큰 이유로 작은 슬픔은 그 자리에 잊혀져 묻혀있다.
산행은 바람의 말을 듣고 구름의 숨결을 느끼며 햇볕이 나누어주는 다정에 미소를 보는 것이다. 이를 다 알아채면 산이 가끔씩 윙윙 울어대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큰 산은 슬픈 것이다.
대자연 앞에 생명이 허망했듯, 보이지 않는 벌레노래 앞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산장 앞에 놓여졌던 눈 신들이 발에 빠짐을 다소라도 막아 주었듯이 우리들의 자가격리가 또 다른 자유를 향한 삶의 디딤목이 될 것이다. 늦은 저녁 귀가를 해야 하는 멤버들을 배웅하며 산을 내려가다 보았던 하늘에 둥근 달은 이 땅에 서릿빛을 쏟아붓고 있었다. 온화했던 달빛의 알 수 없는 분노는 경고였다.
하찮은 것들에게 눈 돌리지 않은 나에 실수는 분노를 지나 슬픔이 되었고 눈 맞으며 내려온 산에서 40여년 알고 지냈던 산은 사람은 자연에 한 조각이었다. 이제 어느덧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저잣거리에서 다시 들어가 쉬어야 하는 자연에서 모두가 함께 하는 기쁨은 이해와 용서, 희생과 나눔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간격을 지키며 나 스스로를 가두어야 하는 외롭고 슬픈 ‘생활의 거리두기’ 시대가 온 것이다. 막힌 트레일 헤드가 열리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같이하는 앞으로의 산행은 양말을 뒤집어 벗어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글·사진 염승찬
산악문화 칼럼리스트
산행문의: ekorea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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