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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10/28  조이시애틀뉴스
[레지나 칼럼] 고국에서 돌아본 삶과 노후 준비

우리 집은 아버지의 청결함과 엄마의 부지런한 성격 덕분에 늘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나 역시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험악한 동네에서 어떻게 무사히 20대를 보냈는지 감사할 따름인데, 당시 나는 동네를 걸어 다니며 쓰레기를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식품을 사고 받은 봉투를 들고 다니면서 길에 버려진 캔과 병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다.



학교에 갈 때도, 일하러 갈 때도 내 손에는 쓰레기봉투가 들려 있었다. 젊은 여자가 그러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아니면 조금 이상하게 보였는지, 내가 살던 ‘아갈’ 거리의 동네 청년들은 나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지나가면 길을 터주곤 했다.


사실 속으로는 청년들이 서너 명씩 모여 있는 길을 오가면서 무섭고 떨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두려운 마음을 꽁꽁 숨긴 채 늘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야말로 목에 힘을 주고 눈을 반짝이며 걸었다. 조금도 허술한 틈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다녔던 기억이 난다.


46년의 미국 생활 동안 임상상담사와 사회복지사로, 또 미국 사회의 프로그램 매니저로 일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바쁜 가운데서도 주위를 돌아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잘하는 일에 눈을 돌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며 살았다.


그렇게 30년간의 일을 마치고 은퇴한 뒤, 젊은 시절 떠나온 한국에 대한 향수를 안고 고국 여행을 계획했다.


석 달 동안 머물 계획으로 비용을 계산해보니, 달러 환율을 고려할 때 한국에서는 돈 쓰는 일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우선 숙소를 석 달간 계약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사느라 관절에 무리가 와 구부러진 손가락도 쉬게 해주고 싶었다. 식사는 사 먹고, 남는 시간에는 새로운 지역을 찾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한국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무너졌다.


팬데믹 이후 한국의 식탁 풍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다양한 배달 음식과 식당 음식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었지만, 내가 맛본 음식들은 예전의 담백한 맛과 달리 달거나 짰다. 평소 담백하게 먹던 우리에게는 입에 맞지 않았다.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김치도 신경이 쓰였다.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 김치를 사용하는 곳이 많아, 식당에 가면 먼저 김치의 원산지를 확인하게 됐다. 중국에서 김치를 만드는 일부 과정을 접한 뒤부터는 중국산이라고 하면 아예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마침 머물던 숙소에 부엌 시설이 있어 신선한 오징어와 고등어, 갈치 등 좋은 재료를 사다가 하루 한 끼는 직접 제대로 해 먹었다. 밖에 있을 때는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깨끗하고 격조 있는 식당을 찾아 채소 위주로 식사하곤 했다.


50년 전 함께 지내던 친구들 가운데는 서울에 자리를 잡고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지방으로 옮겨간 친구들도 있었다. 서울에서 자기 집을 마련하기에는 집값이 너무 비싸 살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여유 있게 사는 친구들은 좋은 차를 타고 전망 좋은 비싼 아파트에 살았다. 주변에 온갖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반면 예전에 함께 교회에 다니던 친구 중에는 생활이 어려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젊어서는 집에서 살림을 하다가 남편이 55세 무렵 은퇴하자, 생계를 위해 소규모 사업에 뛰어든 친구도 있었다. 주로 프랜차이즈 음식점 등을 시작했지만 운영 경험이 부족해 은퇴자금을 모두 잃고, 6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부부가 힘겹게 일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어디에서 살든 마찬가지겠지만, 은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노년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벅찰 수 있는지 그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젊어서 열심히 일했어도 저축이 되어 있지 않으면 노후의 삶은 어려워질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건강까지 따라주지 않으면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며칠 전에는 선교사 부부인 친구를 만나고 생각이 참 많아졌다. 젊어서 귀한 마음으로 외지에 나가 복음을 전하며 살았지만, 은퇴 후 돌아와 보니 마땅히 살 곳도 없었다. 몸은 나이가 들어 일하기도 벅찬데,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일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한국의 물가도 생각보다 비쌌다.


사과 네 개에 만 원이었다. 미국 돈으로 계산하면 약 8달러였다. 차를 빌리려다가 운전에 자신이 없어 전철과 택시를 이용했는데, 두 달이 지난 현재 교통비로만 1,200달러가 조금 넘게 들었다. 이곳에 사는 어르신들은 전철 무료 이용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간 머물며 본 한국은 놀라울 만큼 발전해 있었다. 여기저기 다니기에도 무척 편리해 새삼 감탄할 정도였다.


어디를 가든 산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어릴 적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나무 심기 운동을 하며 심었던 나무들이 떠올랐다.


어릴 때 송충이 잡기 운동에 참여했던 기억도 났다. 송충이 한 마리를 잡으면 십 원인가를 주었던 것 같다. 깡통에 줄을 매달아 들고 다니면서 나뭇가지로 만든 젓가락으로 징그러운 송충이를 잡으러 다니곤 했다.


음식점의 음식값은 비교적 저렴한 편이어서 사 먹으면 됐지만, 단맛과 짠맛 때문에 직접 재료를 사다가 음식을 해 먹으니 오히려 재료비가 만만치 않았다.


수술 후 회복 중인 무릎이 아파 정형외과에도 가보았다. 한국 의료보험 혜택이 없는 나는 두 차례 방문에 50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한국에서 지내보며 내린 결론은, 나고 자란 고국보다 46년을 살아온 미국이 이제 내게 더 알맞은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의 삶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산다는 것은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기에는 오랜 세월 미국에서 이루어놓은 삶이 내게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이만큼 세월이 흐른 뒤 삶을 돌아보니,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열심히 살아가되 내일을 준비해두어야 노년의 걱정과 근심을 덜 수 있다고.


물론 경제적인 준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몸도 평소에 잘 돌보아야 나이가 들어서도 아픈 곳을 줄이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레지나 채
소셜워커, 워싱턴가정상담소 소장
이메일: regina.chae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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