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뉴스가 실시간 영상으로 날아오는 2025년 2월, 한동안 베트남 전쟁에 대한 책을 읽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생포된 북한 병사 뉴스를 보면서 60년 전 월남에 파병된 우리 한국군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동대문구 한 자동차 부품 상점 앞에 고엽제전우회 표지가 붙여진 차량이 주차된 것을 보았다. 운전자에게 다가가 차 주인이 누군가 물어보고 싶었다.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생업에 열중인 그분에게 접근하는 대신 집으로 돌아와 관련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월남전에 관한 책을 빌렸다.
(1)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외, (주) 북하우스 퍼블리셔스, 2021 (2)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베트남전쟁,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3) 무기의 그늘, 황석영, (주) 창비, 2006 (4) 한권으로 읽는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등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에게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운 전쟁으로 기억된다. (2, 11쪽)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58,315명이 전사했고, 30만 명 이상이 부상했으며, 83만 명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다. 베트남 전쟁 후 미국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도입했다. (베트남 전쟁, 위키백과)
1964년, 5월 9일 미국 존슨 대통령의 요청 (4, 146쪽)과 7월 15일 남베트남 웅웬칸 수상으로부터 한국군 파병 요청 서한을 받고, (4, 148쪽) 한국은 7월 31일 국회 본회의에서 파병 동의안을 만장일치 통과시켰다. (4, 149쪽) 제1차 파병은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이었으며 이들은 부산항에서 출항하여 1964년 9월 22일 사이공에 도착했다. 총 4차 파병으로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병력 누계는 32만 명에 달했다.
파병이 최고조로 달했던 1968년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수는 5만여 명이었다. 베트남전 동안, 한국군은 5,099명이 전사하고 11,232명이 부상했다. (4, 429쪽) 그리고 2025년 1월 31일 현재 132,945명이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국가보훈부)
베트남은 사이공 정부군 11만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41만 5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노이 정부는 1975년 정부군과 베트콩 110만여 명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4, 120쪽) 이 전쟁에서 300만~5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베트남 전쟁, 위키백과)
사이공 정부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책략에만 몰두한 채 국제적 지지를 얻는데 무관심했으며 모든 것을 미국에 맡겨버렸다. (4, 102쪽) 1973년 1월, 닉슨 대통령의 안보 담당 보좌관 키신저와 하노이 정부의 정치국원 레둑토 사이에 평화협정이 조인되고 발효되었다. 파병되었던 한국군은 3월 23일까지 철수 복귀하였다. (4, 111~112쪽)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하여 무력 통일되었다. 1975년 4월 21일 (4, 119쪽) 티에우 남베트남 대통령은 사임하고, 베트남을 떠나 최종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베트남 전쟁, 위키백과) 4월 28일, 남베트남의 군 최고책임자 참모총장 비엔 장군이 혼자만 살기 위해 군복을 벗어버리고, 미 대사관으로 달아나 헬기를 이용해 탈출했다. 이로써 남베트남군은 저항을 종료하였고 미 대사관에 남아있던 미해병대는 헬기를 이용해 4월 30일 철수해 미국인 철수가 완료되었다. (4, 119쪽)
한국전에서 경험한 중국의 개입을 두려워한 존슨 대통령은 군부가 강력히 주장한 북진 작전을 거절하고, 지상전은 남베트남 지역에 한정하였다. (4, 102~103쪽) 미군과 한국군 등 연합군은 전투 지역의 구분이 없이 은거한 베트콩과 남파 북베트남군과 교전하게 되니 베트남전은 민간인의 피해가 많은 상황이 발생한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전쟁의 참상이다.
한 인간이 어린 나이만 있다면 죄가 생기지 않겠지만,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되고 일생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은 자신이 가해자 입장이 되는 국면과 만난다. 국가도 개인도 개체라는 구분은 외부와 구분되기에 경계를 형성하며, 그 경계를 유지하는 것은 윤리적이지가 않다. 그렇기에 인간은 끝없이 체험하고 반성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인간으로서의 다짐과 노력을 하는 것이다.
지난해 2024년 12월 3일 한국의 계엄 선포 2시간 동안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군인 신분임에도 절제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였다. 그처럼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군인조차 그 전 세대의 잘못을 판단하며 같은 현장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가능한 한 선택을 할 것으로 본다.
전쟁에서 민간인과 군인을 구분하지만 결국 군인 또한 보호되어야 할 개인이며 같은 사람이다. 기억은 보상되지 않는다. 국가가 장병을 전장에 보내 발생한 모든 책임은 국가에 있다. 베트남전 파병으로 인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누린 한국민 모두는 열매도 책임도 같이 나누어야 할 당사자이다.
이번 베트남 전쟁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잘 몰라서 새로웠던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해외파병을 군사와 안보 목적에서 한국 측이 먼저 제안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감군 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1954년과 1958년 파병 제안이 있었고 (2,25쪽), 이어 이뤄지진 않았지만 1961년 박정희 의장의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베트남 파병 의사 표명이 있었다. (2, 27쪽)
이번 우러전쟁에 러시아에 북한군 파병도 러시아 아닌 북한 측의 생각을 러시아가 신속하게 수용한 결과라고 한다. (NYT, 2024, 12, 23) 60년 차이를 두고 남과 북의 해외 파병에 마음이 복잡해지는 대목이다.
둘째, 전투부대 파병의 대가로 존슨 대통령이 K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설립을 지원해 준 점이다. (2, 228쪽) 한국의 경제 개발을 위해 필요했던 중화학 공업, 그리고 전자 정보기술 산업 시대를 지날 때까지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요람이 된 KIST의 유래가 그랬었다니, 그 옆 동에서 1980년대 후반 실험실 생활을 했던 나는 그때 이 이야기를 들었어도 뜻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 당시 제안과 결정이 무척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셋째, 베트남은 대한민국과 같이 중국을 국경으로 접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유사점이 많다는 것이다. 태어나 보니 아시아인데 미국이나 유럽을 더 친숙한 교재로 여기며 성장해 왔던 것 같다.
물론 비슷하기에 서로 밀어내는 면이 있을 수 있지만 이제는 인종적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시안끼리의 이해와 협력이 더욱 필요하다.
신순영
조이시애틀뉴스 서울통신원
고려대 농학박사
soonyoung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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