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서 말하는 밥솥으로 아침을 지어 먹었다. 낭랑한 목소리로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정한 말투로 “취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증기가 배출됩니다.”
전화번호를 알아보려 114에 문의하였더니 “고객님 번호를 늦게 눌렀습니다. 다시 한 번 눌러주십시오?” 물을 먹으려고 정수기의 버튼을 누르니 “알칼리성 음료수가 나옵니다”라 한다. 증손주가 동화책을 펴니 책이 말 한다 “아주 먼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장난감들도 말을 한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아 여러 친지들을 방문하였다. 아들이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고 출발하니 내비게이션이 말을 한다. “20 미터 전방에 급커브가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가는 동안 내내 그치지 않고 혼자 지껄인다.
친지를 방문하는 곳마다 고층건물이라 엘리베이터(승강기)를 타고 올랐다. 아리따운 아가씨의 목소리가 정겹고 다정하다. “문이 닫힙니다.” 말과 동시에 문이 미끄러지듯 스르르 닫혔다. “다음은 2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이렇게 안내방송은 계속되었다. 42층에 사는 딸네 집은 너무 높아 올라 다닐 때 어질어질하다.
미국에서 25년간 살면서 기껏 높아야 6층 아파트를 올라 다니다가 초고층의 아파트를 엘리베이터로 단숨에 오르니 귀가 멍하다. 미국 우리 노인 아파트는 작동이 너무 느려 갑갑하고 한국에서 방문 온 친지 보기에 좀 창피하였다. 출발 버튼을 누르면 한참 후에 뜸을 들였다가 올라가고, 또 섰다가 오를 때도 역시 꾸물거렸다.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말로 안내도 없었다.
고국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 전철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보면 반은 뛰다시피 빨리 걷는다. 소나기 올 때 한국 사람은 소나기를 피하려 빠르게 뛰어 간다. 그런데 중국 사람은 느긋이 비를 맞으면서 천천히 걸어간다. 그러면서 뛰어가는 한국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무엇 때문에 뛰어가느냐? 얼마 있으면 그칠 비를 왜 쫓아가서까지 맞느냐?” 하며 비아냥거린다고 한다. 여기에서 중국 사람들의 만만디근성을 엿 볼 수가 있다.
한국의 엘리베이터도 덩달아 작동이 빠르다. 출발하면 금방 올라가고 금방 문이 열리고 닫히고 시원하게 상하운동을 한다.
내가 사는 미국의 6층 노인 아파트는 그 지역에서는 최고층이다. 대개의 아파트는 3층 그것도 지하 1층 지상 2층이다. 땅이 넓다 보니 집을 높게 지을 필요가 없다. 우리 노인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굼벵이처럼 꾸물거리는 이유를 아파트 매니저는 이렇게 말했다.
“노인 아파트 주민의 평균 연령이 80세입니다. 대부분 병이 있어 잘 걷지를 못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의 동작이 느립니다. 만약 빨리 움직인다면 노인들은 중심을 잃고 금방 넘어질 수 있어요,”
아주 오래 전 시교육위원회 장학사 시절 입학업무의 과로로 쓰러져 입원한 상사의 문병 겸 결재를 맡으러 직원들과 함께 어느 대학병원에 갈 때의 일이다. 그 때는 엘리베이터 걸(girl)이 수동으로 운행하던 때였다. 젊고 예쁜 목소리로 “다음은 5층입니다. 6층은 서지 않고 7층에 섭니다.”
당시는 에너지 절약 때문에 엘리베이터 운행을 제한했던 때였다. 6층에 입원한 환자를 보러 가는데 서지 않으면 동행한 직원 일행이 모두 계단으로 걸어올라 갈 형편이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시간을 빼앗겨 바쁜 스케줄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6층에 꼭 서야만 하는데 서지 않는다니 참으로 난감했다.
짧은 시간에 6층에 서도록 해야 할 터인데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일행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아가씨! 장학사들 모두 상사를 문병하고 업무결재를 맡으러 가는데 6층에 꼭 내려야 해요. 안 그러면 이번 입시업무에 차질이 생겨요. 부탁합니다.”
다급한 마음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 버렸다 그게 아마 1초나 걸렸을까? 망설이고 생각만 하고 있던 그 아가씨는 6층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6층에 섰을 때, 몇 초만 지나면 서지 않고 올라갈 터인데 일행은 환호를 지르며 내렸다. 모두 그 짧은 시간에 순발력 있었던 나의 대처 능력에 감동하는 듯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 엘리베이터 걸은 서지 않도록 되어 있는 층은 절대로 서지 않는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세워 달라고 사정을 해도 상부의 지시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그 아가씨의 덕분으로 상사를 위문하고 결재를 원만히 맡을 수가 있었다. 지금은 말하는 엘리베이터가 자동적으로 안내하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아가씨가 육성으로 웃으면서 안내했던 그 시절이 정겹기만 하다.
초고층 아파트에 올라가 있으면 건물이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만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게 비정상이라고 한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아파트 멀미를 하는데 이를 ‘빌딩 병‘이라 부른다.
하루는 초고층 아파트 아래 화단에서 어머니는 서서 있고 고등학생인 아들이 흙을 두 손으로 한 옴큼 담아 코로 흙냄새를 맡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어머니로부터 왜 흙냄새를 맡고 있는지 그 사연을 들었다. 47층 아파트로 이사 왔는데 애가 어지럽다며 멀미 증세를 호소하였다고 한다. 누가 그러는데 사람이 흙을 밟고 흙 위에서 살아야 건강한데 흙하고 멀리 떨어져 사니까 멀미를 한다고 하며 흙냄새를 맡으면 낫는다고 해서 이렇게 냄새를 맡고 있다고 말했다.
말하는 문명의 이기는 무척 많다. 전철, 버스, 방송도 말을 한다. 요즈음 일본에서는 로봇이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獨居老人)의 친구가 되어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재미있게 놀아준다고 한다. 귀가 어두운 노인을 위해 큰 소리로 말하는 로봇, 걸음을 걷는데 도움이 되어 도와주는 로봇이 있다.
아무도 돌보기를 싫어하는 소외당한 노인을 위해 다정다감한 말로 위로해주고 사랑하는 로봇이 어느 때는 자식보다 훨씬 났다. 비록 사람 얼굴이 아닌 로봇 얼굴이지만... 그래서 치매도 덜 앓고 우울증도 사라진단다. 로봇의 말소리가 노인 건강에도 기여한다니 과연 인간의 문명은 어디까지 발전하게 될까.
이성수 (워싱턴주 페더럴웨이 거주)
수필가, 서북미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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