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서 벤쳐 투자가로 활동하는 이인(미국명 아이크 리) 싱가폴 국립대 초빙교수의 저서 '무빙 (MOVING)' 최신판에 수록된 내용을 이번주부터 게재한다. 한국인이 직접 겪은 미국 초기 이민 생활을 여러 각도로 펼쳐내 한인들에게도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들을 선정, 총 5회에 걸쳐 소개한다. 이 글을 읽은 후 독자 감상문을 적어 이메일(Editor@joyseattle.com)로 보내면 3명을 선정, 저자가 직접 사인한 책을 증정한다. <편집자주>
요즘 대구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당시 우리 집은 산비탈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동네 골목은 한 번에 차 한 대만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았다. 그 도로는 늘 이륜 인력거, 소나 말이 끄는 수레, 쌀가마나 물통을 긴 막대기 양쪽에 연결시켜 어깨에 메고 다니던 사람들로 하여금 무척 분주했던 골목길이었다.
간혹 등굣길에 분뇨통을 지고 가는 아저씨를 지나치기도 했다. 코를 틀어막고 기겁을 하며 도망가는 꼬맹이들에게 어른들은 똥장군을 보면 운수가 좋다며 놀리기도 했는데, 나는 어른들 말씀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을 피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너 댓 개 정도의 좁은 골목들이 한 곳에 연결된 그 도로는 동네 사람들이 저녁때만 되면 옹기 종기모여 하루 일과의 피곤함을 풀기에 딱 좋은 미니 광장 같은 곳을 만들어 주었다. 저녁 식사만 끝날 때쯤 되면 가족끼리, 이웃끼리 자연스레 그 곳에 모여들어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유일한 휴식터가 되어 주었다.
나는 또래 친구들과 형들 그리고 어린애들도 함께 모여 뛰어 놀다 보니 광장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여자애들은 주로 공기놀이나 줄넘기를 했고 나는 친구들과 스펀지로 만든 공놀이 그리고 힘 겨루기 같은 것을 하며 놀았다.
이 밖에도 넷플렉스 인기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소개되었던 대부분의 놀이들을 하며 밤늦게까지 뛰어 놀았다. 어른들도 아이들 못지않게 시끄러웠다.
별거 아닌 것으로 늘 깔깔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참으로 정겨워 보였다.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은 “저녁 식사하셨어요?”, “남편은 오늘 돈 좀 벌어 왔데요?”, “할머니 편찮으신 건 좀 어떠세요?”, “머리핀이 참 잘 어울리네요.” 등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다. 생필품과 소득이 현저히 부족했을 때라 이와 같이 먹고 사는 것들이 모두에게 최고의 관심이었던 시절이었다.
초등 3학년 무렵, 더위가 물러난 어느 초가을 저녁에 어디선가 맑고도 가슴 속을 파고드는 듯한 애잔한 악기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평상시 나를 귀여워해주던 고등학생 동네 형이 하모니카라고 하는 작은 악기를 입에 대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 모두 애잔함에 가슴을 울리는 이 작은 악기에 혼이 쏙 빠져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하모니카 연주자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저녁을 먹자 마자 미니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둘러앉아 감미로운 하모니카 연주 소리에 맞춰 박수도 치고 노래도 따라 부르면서 피곤했던 하루의 일과를 끝내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 형의 연주를 매일 듣다 보니 나도 하모니카를 불고 싶은 강한 열망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당시엔 텔레비전은 커녕 심지어 라디오를 가진 집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라 동네 형의 하모니카 연주는 온 동네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던 중요한 시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부모님께 하모니카를 사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못마땅해 하시며 공부에 더 집중하라고 하셨다. 내가 부모님께 무언가를 사달라고 간청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상심이 컸던 것 같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밥도 먹지 않고 곧장 방에 틀어박혀 며칠 동안 그렇게 지냈다. 나는 밤마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하모니카를 멋지게 연주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나의 몸무게가 급격히 줄어가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별 말씀 없이 기다란 작은 박스 속에 담긴 새 하모니카를 건네 주셨다. 영영 갖지 못할 줄 알았던 하모니카가 결국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나에게는 최고로 기쁜 날이었다.
어떻게 시작해야 되는지도 몰랐지만 머지않아 세계 최고의 하모니카 연주자가 되겠다는 오기가 발동하여 틈 날때마다 연습에 열중했더니 실력도 차츰 늘어나면서 재미도 있었다.
한 달 간의 맹연습 끝에 드디어 내가 동네 어른들과 친구들 특히 하모니카 형이 쳐다보는 앞에서 실력을 보이게 되는 난생 첫 무대에 오르는 날이 다가왔다.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이미자 가수의 “동백아가씨”가 아니었나 싶다. 그 당시 모두가 그 노래만 불렀던 때라.
연주가 끝나자 말자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모두들 나를 마치 록 스타인양 환호를 해 주었고 모두들 나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어깨를 쳐주며 마치 큰 축제가 벌어진 듯 기뻐해 주었다. 동네 형도 하모니카를 자기보다 내가 훨씬 잘 분다며 무척 기특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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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인들이 선물로 보내준 하모니카 |
그날부터 나는 거의 매일 저녁 그 공터에 나가 하모니카 연주를 했다. 그러면서 차츰 실력도 늘어나면서 한편 사람 앞에 나 서는 것도 익숙해 지기 시작했다.
먹을 것은 물론 모든 생필품이 부족했던 그 시절, 매일 저녁만 되면 이웃 모두가 한 곳에 모여 서로 위로도 하고 함께 왁자지껄 떠들고 웃으며 하루의 피로도 풀게 해준 그 작은 공터가 우리 모두에게 유일한 낙이 되어 주었고 굶주림을 잊게 해 준 하나의 위로의 전당 같았다.
비록 그 당시 찢어지듯 가난했고 응어리진 한이 뭉쳐져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몇 사람만 모이면 늘 흥겨운 노래가락으로 하루의 마무리를 할 줄 아는 천성적으로 고운 민족이란 생각을 한다.
하루는 학교 친구들에게도 자랑하고 싶어 하모니카를 가져갔다.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했더니, 친구들은 물론 담임 선생님도 소리를 들으신 것이다. 그 분은 즉시 나를 교사 휴게실로 데려가 모든 선생님들 앞에서도 연주하게 했다.
옆방에 계시던 교장 선생님도 무슨 일인가 싶어 휴게실에 들어오셔서 함께 들었다. 그런데 그 교장 선생님은 판을 훨씬 더 크게 벌리셨다. 모든 학생들이 내 연주를 들을 수 있도록 아침 등교 시간에 교내 방송장비 마이크 앞에서도 하모니카를 불게 하셨다. 그리고 운동회 같은 학교 행사가 있을 때에는 단상에 올라가서 하모니카를 연주하게 되어 학교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꼬맹이 스타가 됐다.
몇달쯤 지나서는, 대구 근교에 소재한 육군 신병 훈련소의 훈련병을 위한 위문 공연에도 초청을 받아 하모니카 독주를 했다. 그 장소는 바로 그때부터 12년이 지난 후 내가 신병 기초 훈련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내가 섰던 그 무대에서 귀여운 초등학생들이 훈련병을 위한 위문 공연을 관람할 때 나의 옛 하모니카 연주를 했었던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어느 날 하굣길에 동네 골목 진입로 지나자 말자 경쾌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 소리가 날아와 내 귓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철 대문이 있는 이층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에게 피아노 소리는 또 다른 세계였다. 은근히 배우고 싶은 욕망이 생겼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실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잊기로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피아노를 연주하던 아이는 사립학교를 다니는 내 또래의 소녀였다. 그 아이와 나는 ‘신분’이 달라서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여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성격을 가진 아이인지 은근히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또래 친구 둘을 데리고 그 아이의 집 앞으로 갔다. 피아노 연주에 맞춰 하모니카를 연주하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까 싶어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하모니카를 열심히 불어 댔다. 그 이 후 며칠동안 학교 끝남과 동시에 친구들과 함께 달려 가서는 피아노 음률에 맞춰 하모니카 연주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철 대문이 열리면서 그 소녀의 어머니가 나타나 큰 소리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우리를 쫓아냈다.
이후에도 피아노에 대한 집착이 떠나지 않았지만, 결국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먼저 어린 소년이 감당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피아노는 나에게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사치였다.
요즘도 한번씩 세계적인 거장들의 연주회에 갈일이 생긴다. 그들의 연주 소리에 빠지다 보면 옛 비탈길 동네에서 지냈던 정겨운 추억의 장면들이 떠 오른다. 동네 아이들이 뛰어 놀면서 질러대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까르르 어른들의 숨 넘어가듯 웃는 소리 등, 비록 불협화음 소음들 이였지만 나에겐 아직도 그 시절 생각이 난다. 아름다운 추억이란 시도때도 없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매직이 있는 듯하다.
CEO, LTC 이노베이션, Inc.
싱가포르국립대학교 경영대 초빙교수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 사외이사
저서 : 'Wonder', 'Tomorrow', 'Moving' (영문판, 한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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