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 후 3년 만에 개인 회사와 고급 지역에 주택까지 소유를 하게 되자 은근히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출액이 늘어날 때마다 발생되는 수익금의 대부분을 공격적으로 재투자를 했다.
연구소도 설립했고 본 지사의 인력들 충원과 함께 지출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사업 경륜과 지혜가 현저히 부족했었지만 패기만이 넘쳐흘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차츰 상황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완벽하게만 보였던 그림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태가 한쪽으로 많이 기울진 상황이었다. 1980년도 말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소련이 그 배경에 있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었고 미국의 방위산업부터 급속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다.
서울의 대기업이자 주 거래처에서는 이미 주문을 끝낸 기존 계약조차도 가차 없이 취소하는 무례함을 보였고 나 같이 힘없는 하청 기업들은 견디다 못해 연쇄 도산이란 입장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서울의 거래처와 계약 당사자들도 나의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고 아무런 답장도 해 주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사무실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어떨 때는 일주일에 두 번씩 서울로 날아가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계약서도 없이 구두 주문과 생산을 재촉했던 담당자와 간부들을 보직 개편이란 명분으로 지방으로 보내 버리거나 도피를 시킨 대기업의 불공평한 횡포에 피가 말라갔다.
나는 그들의 선주문을 믿고 이미 지불된 생산 자금에 대한 책임까지 내가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회사의 상태가 급속히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미국에서 시작했던 나의 첫 사업이 불행하게도 원 위치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사업이란 자신감과 패기만으로 이길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과거에도 수차례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실패만은 피하고 싶었다. 모두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지만 나에게 실패는 그냥 쓰기만 했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입장 그래서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새로운 일 거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당분간 한국등 아시아에서 필요한 미국산 제품을 수출해 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하면서 몇 상품에 대한 현지 반응을 보았더니 괜찮은 편이라 서울로 날아가 세일즈 활동에 나섰다.
노력에 따른 결과가 생기고 매출도 조금씩 발생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각종 주방용 가전제품이나 철강 제품의 부식을 방지해 주는 화학용품, 특급 호텔에 소요되는 소모품 같은 것들이었다. 이 모든 상품 정보는 대개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찾아낸 것으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찾는 사람들에게 내가 늘 권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양한 인맥을 통해 미래지향적 사업에 대해 꾸준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방위산업이야말로 미국의 근간이라고 믿어왔는데, 그것마저도 믿을 만한 산업은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미국경제를 버텨 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강한 호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나를 불안에 떨게 했다.
1988년 말 어느 날 다소 풀이 죽어있던 나에게 한통의 전화가 도착하게 된다. 과거 거래처 텍사스 소재 반도체 회사인 TI(Texas Instrument)에 근무했던 수석 엔지니어가 갑자기 연락을 해 와서는 “급히 의논할 것이 있으니 속히 댈러스에서 만나자”며 재촉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도 방산 산업 쇼크에 따른 정리 해고된 피해자 들였다. 그런 그들이 무슨 새로운 첨단 사업을 벌였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알아듣지 못하는 기술적인 얘기만을 했다. 나는 며칠 고민을 하다가 속는 셈 치고 일단 가보기로 했다.
나는 달라스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첫 사업 실패에 따른 실의에 피곤한 눈으로 창밖의 광활한 미국땅을 내려다보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점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을 못한 채 말이다.
그들은 댈러스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리처드슨이라는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의 창업단지 판교의 몇 배에 달하는 큰 도시가 됐지만, 당시에는 드넓은 농경지와 초원 한가운데 작은 곡물 창고 같은 작은 단지 몇 채만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 그들의 사무실을 찾아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니 눈앞에 보이는 직원들은 모두 뛰어다니는 듯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창업자로 변신한 두 친구들이 나를 보더니 가벼운 인사조차도 건너뛰면서 곧장 나의 팔을 끌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자 말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신줄을 놓칠 뻔했다.
그들 얘기의 주제는 향후 PC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인텔 CPU(중앙처리장치)에 장착되지 않은 별도의 연산장치인 코프로세서(Co-processor) 디자인 전문 사이릭스(Cyrix)라는 반도체 창업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그 부품은 향후 한국과 대만이 미국 다음 최대의 시장이 될 것으로 예상하는데 나에게 그 시장의 판매를 맡아달라고 제의하기 위해 득달을 하며 나를 부른 것이었다.
나는 우선 몇 안 되는 직원들과 엔지니어들만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회로 설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고 고무가 되어 그 자리에서 악수로 화답을 했다. 이제는 내가 그 회사에서 세일즈 디렉터로 일할 것인지, 독립된 세일즈 파트너로 업무를 맡을 것인지만 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후자의 조건은 소정의 창업 주식과 매출액에 따른 일정한 커미션을 받는 것이었다. 물론 회사가 잘 되어 나스닥 상장이 이뤄진다면 전자가 훨씬 큰 보상이 따르겠지만 나는 한 회사에 전적으로 몰빵 하는 것이 불안해서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엘에이로 돌아와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번의 기회를 통해 나는 또 다른 세상에서 어떻게 변해갈지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도 있었지만 나를 믿어준 그들을 위해 힘을 바치기로 다짐을 하면서 마음의 문도 활짝 열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배우기 위해 가까운 대학에서 몇 주간 진행되는 반도체 기술에 대한 클래스도 듣고 관련 책들도 읽으면서 새로운 분야에 기초 지식을 쌓아나갔다. 그리고 사이릭스 본사 달라스에도 부지런히 드나들며 PC 산업에 대한 정보 수집은 물론 아시아 시장의 예상 소요와 판매 계획에 대한 전략도 세워 나갔다.
PC회사 데모에 필요한 첫 테스트 키트가 예정보다 빠르게 완성이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들의 개발 속도나 전 임직원들의 업무 집행 속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흔히 말하는 ‘스타트 업 기업의 속도 전’을 피부로 실감했다.
그때까지 미국의 기업 풍토는 ‘업무 처리는 느림보, 오후 5시만 되면 칼 퇴근, 유급 휴가만 챙긴다’라는 선입견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창업 회사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를 실감했다. 나 자신도 이 산업계 문화에 맞게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이릭스 칩 Chip를 위해 샘플을 가지고 곧장 서울로 날아갔다.
서울에서 시장 조사를 해본 결과, 이 칩에 대한 수요가 예상보다 높을 수가 있다는 고무적인 반응이 나왔다. 때마침 삼성물산에서 자회사 삼택(SAMTECH)이라는 별도의 반도체 유통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곧장 그들을 만나보았다.
며칠간 회의를 거듭한 끝에 사이릭스 칩이 이들의 첫 유통 상품으로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해, 사이릭스 한국 시장의 공식 유통 파트너로 삼택을 선정했다. 시장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두 명의 사이릭스 설립자들도 한국과 대만에서의 판매 지원을 위해 수시로 날아왔다.
모든 전략을 총동원해서 열심히 판매 활동을 했더니 시장의 반응도 대단했고 매출도 폭등했다. 나는 내가 맡은 업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을 1992년 중반 어느 날 이 회사가 나스닥 상장 준비 중이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적이 충분하여 상장의 조건에 충족하게 되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다. 짧은 연혁에도 불구하고 모든 임직원들이 헌신적인 노력에 따라 급기야 그다음 해 1993년에 공식 상장 회사가 된 것이다.
개장 첫날 새벽에 모든 임직원이 숨을 죽이고 모니터 앞에 모여들었다. 나스닥 거래소의 모니터에 불이 켜지면서 첫 거래가 13달러에서 시작을 하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가격 변동이 오락 가락 하는 움직임 속에서 마감 때는 19달러로 껑충 뛰게 되었고 결국 대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설립자들과 경영진은 물론이고 말단 비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큰 부를 손에 쥐게 된 기념비적인 그 현장에 바로 나도 있었다. 나도 증여받은 주식을 통해 그동안 노력에 따른 넉넉한 이익을 챙겼다. 흔히 말하는 나에게도 ‘아메리칸드림’이 이뤄지는 꿈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생긴 보너스는 그것 말고도 훨씬 대단한 것이 별도로 있었다. 오랫동안 ‘미국이란 나라의 막강한 경제력의 근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사이릭스라는 작은 회사의 성장 전 과정을 통해서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이다.
직접 미국 창업 생태계를 현장에서 경험한 기회가 내 인생의 가장 큰 터닝 포인트였으며 이를 계기로 나도 벤처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데 결정적인 모멘텀이 되어 주었다. 그 경험에 대한 값어치는 세상 무엇하고도 바꿀 수가 없는 경이로운 자산이 되어 준 것이다.
우연히 그렇게 벤처 산업의 길로 들어섰던 나는 호기심을 담은 눈길로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을 지켜보았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융 시스템이 미국에서는 이미 100년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좋은 사업 계획서만 있으면 집문서 같은 담보 대신 창업 지원 자금을 받을 수 곳이 바로 미국이었다. 알고 보니 애플이나 마이크로 소프트 같은 초대형 기업들도 그렇게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요즘 전 세계 10대 기업 리스트에 오른 회사들의 대부분은 불과 몇 명이 모여 창고에서 시작한 벤처기업들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오일회사나 유통그룹 혹은 은행들이 상위권을 차지했는데 이제 그들의 대부분은 10위 밖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창업자들의 열정과 사업계획서를 분석한 후 투자했던 자본가들의 수익률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제 전 세계가 앞을 다투어 창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 모두는 요즘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모험적인 금융 시스템이었지만 미국다운 개척정신의 투자 지원 방법이 창업의 텃밭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다. 창업자와 투자가 사이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별도의 수많은 경험을 거친 컨설팅그룹과 법률 자문 전문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투자은행과 재무기관들, 그리고 기술과학 및 경영대 등과 원활하게 협업이 이뤄지는 거대한 벤처 산업 생태계가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이 되어 언제나 숨 가쁘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정부 지원도 없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져 자연스럽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웠다. 결국 벤처 산업이야 말로 기술발전 생태계 속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가 경제 전체에도 막강한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미국 경제의 단단한 뿌리였던 것이었다.
나는 사이릭스 성공의 전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반도체 산업의 리더와 각 분야에 영향력이 있는 주요 인사들과도 교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중 사이릭스 성공에 큰 역할을 했던 세빈 로즌(Sevin Rosen) 벤처 투자그룹의 추천을 통해 실리콘 밸리의 심장부로 알려진 스탠퍼드 리서치 파크(Stanford Research Park)에 입주 허가를 받아 내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의 입주 심사가 무척 까다로운 곳이라고 했다.
HP초창기 스탠퍼드 대학과 최초 산학 협동을 시작했던 곳, 그리고 애플 성공의 큰 역할을 했었던 마우스 특허 보유회사 제록스, 삼성 반도체 초창기 시절에 첨단 제조 장비를 제공했던 배리언 등 IT산업을 바꾼 수많은 첨단 회사들이 이 단지에 터를 잡고 있었고 실리콘밸리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역사적인 곳이었다.
실리콘 밸리는 일 년 내내 잠시도 멈추지 않고 24시간 펄펄 끓는 창업 산업의 용광로 같은 곳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커피숍에서나 대합실, 식당 혹은 공원에서도 그들의 대화는 늘 창업에 연관된 얘기들이 오간다.
십여 년 동안 매년 수도 없이 실리콘 밸리에 출장을 다니다 결국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긴 친구의 말에 따르면, 실리콘 밸리만이 가진 다이내믹한 문화는 그곳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마치 미국 속의 또 하나의 다른 나라 같다는 표현을 했다.
돌이켜 보면 첫 번째 사업의 실패로 큰 고통을 받긴 했지만 그 과정이 있었기에 다음 연결점이 생겼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매번 기회가 생길 때마다 최선을 다했으며 아울러 늘 한결같이 나를 믿어준 친구들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요즘에도 그들과 나는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원활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CEO, LTC 이노베이션, Inc.
싱가포르국립대학교 경영대 초빙교수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 사외이사
저서 : 'Wonder', 'Tomorrow', 'Moving' (영문판, 한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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