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오는 한인 00씨의 몸은 깡마른 탓에 옷이 헐렁해 마치 허수아비에게 옷을 입혀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늘 손에는 오래되어 색이 바랜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서류 뭉치와 커다란, 망가진 우산대가 들어 있었다.
내가 00씨에게 “이 망가진 우산대는 왜 갖고 다니세요?” 하고 묻자 00씨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레지나 씨, 이건 우산대가 아니라 레이건 대통령과 통신하는 데 필요한 ‘레이더망’이에요.”
00씨의 가방 안에는 영화배우 출신으로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을 지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가 영어로 쓰인 노트에 가득 적혀 있었다.
00씨가 보여주는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Dear President Reagan,
I am so glad you are the president of America for a long time.
I am still your good supporter.
But I don’t have a time anymore to waiting for my money back.
Please send my money as soon as possible.
Amounts is $500,9890000…
친애하는 레이건 대통령께,
나는 당신이 정치를 잘해 나가기에
미국을 통치하는 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이 나에게 빌려간
오백 빌리언 달러를 받아야 하니
이 편지를 받는 즉시 그 돈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 돈은 지금 내가 한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한국으로 가는 데 필요한 돈이며, 당신이 그동안 내 돈을 잘 사용했으니 빠른 시간 내에 그 돈을 나에게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2022년도에 우리 사무실이 새 건물을 지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우리 사무실은 시애틀 3애비뉴, 킹 카운티 법원 앞에 있었다. 그 시절, 00씨는 가끔씩 이런 편지를 써서 우리 사무실 로비로 들어오곤 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이층 사무실에 지금 자기를 태우고 갈 대통령 전용 비행기가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으니 이층 비행장으로 자기를 잘 모셔 올려 보내 달라며 프런트 직원에게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억지를 부리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아이구, 이 사람들 봐라. 도대체 뭘 모르는 사람들이네! 지금 저기 비행기가 시동을 켜놓고 날 기다리고 있는데, 빨리 이층으로 올려 보내줘야지!”하며 떼를 쓰곤 했다.
00씨는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서 정성스럽게 쓴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꺼내 프런트 직원에게 보여주며 이 편지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팩스로 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면 프런트 직원은 방송이나 전화를 통해 늘 나를 불러냈다.
나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는 00씨의 편지를 받아들고 “그래요, 이 편지 팩스로 꼭 보내드릴게요. 그런데 이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있어요?”
하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이층 비행장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전용기가 있다며 빨리 올려 보내라고 떼를 쓰던 00씨는 나를 보더니, 마치 아까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구, 레지나 씨가 있네! 반가워요. 정말 레지나 씨는 내가 좋은가 봐. 나만 따라다니네!”
00씨는 사무실의 모든 직원들이 자기 말을 안 들어준다며 속상해하면서 프런트 뒤쪽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는 반갑다고 인사한 뒤, “이 사람들 도대체 말을 안 들어 먹으니 해고시켜야 한다”고 내게 일러바치기도 했다.
나는 00씨에게 말했다. “그래요, 지금 팩스에 문제가 생겨서 못 보내지만 이따가 팩스 머신 고치면 꼭 보내드릴게요. 대신 우리 나가서 잠깐 뭐 좀 사 먹을까요?”
화제를 돌리며 00씨를 밖으로 모셔 나와 사무실 옆 델리 가게로 함께 가서 과자나 사탕을 사 드리면 00씨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하는 표정으로 내가 사준 과자나 사탕을 먹고 그가 머무는 쉘터로 돌아가곤 했다.
거주할 곳이 없던 00씨를 우리 프로그램에서 운영하는 쉘터에 머무르게 하고 정부에서 나오는 웰페어에 신청해 수령할 수 있게 도왔지만, 돈에 대한 관념도 잃어버린 00씨는 그 돈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다.
어느 날은 한 달 치 돈을 받아 나간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누군가에게 돈을 모두 빼앗기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때로는 자기가 받은 돈을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오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우리 사무실이 00씨의 페이리시버(수령자)가 되어 00씨가 매일 사무실로 찾아오게 하고 그날그날 쓸 돈만 조금씩 건네주기도 했다.
00씨를 담당하게 된 나는 00씨의 망상증세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고자 약물 처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같이 근무하던 정신과 의사의 소견서를 바탕으로 킹 카운티 법원에 00씨를 신고하여 강제로 치료 약을 복용하게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법원의 결정은 아무리 정신질환 환자라고 해도 본인이 남을 해치거나 자신을 해칠 위험이 없는 한 본인이 약을 거부하면 강제로 약물 처방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멀쩡한 사람을 병신 만든다”며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00씨를 어찌할 수 없었고, “내가 무슨 정신병이냐”고 끝까지 부인하는 00씨를 결국 설득하지 못한 채 20여 년이 흘러버렸다.
정신줄을 놓아버린 00씨는 그렇게 20여 년을 시애틀 거리를 떠돌았다. 한겨울에는 차가운 빗줄기가 00씨의 몸을 매섭게 때려도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그 세찬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애틀 다운타운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더운 여름에는 두껍고 낡은, 냄새가 폴폴 나는 오버코트를 걸친 채 뜨거운 햇살에 달궈진 시애틀 거리를 맨발로 누비고 다녔다. 00씨는 낡아빠진 가죽 가방과 긴 망가진 우산대를 들고 다니며 거의 매일 우리 사무실에 찾아와 나를 만나고 그날 쓸 돈을 찾아가곤 했다.
가끔은 며칠씩 모습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면 아웃리치 직원들과 내가 00씨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러면 00씨는 어느 빌딩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서 어디서 주워온 골판지 박스를 엉성하게 세워 집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그 앞에는 부서진 가구나 온갖 잡동사니를 벽처럼 둘러세워 담장을 만들어 놓은 채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데도 마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처럼 망상 증세를 보이며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명령을 내리면서 00씨는 이미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호령하고 있었다.
그래도 00씨가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오면 쉘터 생활을 하느라 한국 음식을 전혀 맛보지 못하는 00씨에게 주려고 내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인스턴트 한국 음식을 꺼내 뜨거운 물을 부어 대접하곤 했다.
여러 종류의 인스턴트 음식 중에서도 00씨는 특히 호박죽을 좋아했다. 가끔 00씨가 제정신이 돌아온 듯 말하곤 했다. “참, 레지나 씨. 우리 엄니가 단호박죽을 엄청 잘 끓였었어.
엄니는 가을에 잘 익은 호박을 따다가 속에 있는 씨를 놋수저로 잘 긁어모아 씨만 모아 펌프 물을 끌어올려 흐르는 물에 호박씨를 깨끗이 씻고, 그걸 부뚜막 무쇠솥 옆에 펼쳐놓았다가 밥할 때마다 불을 지피면 아궁이 주변이 따뜻해지잖아. 그러면 호박씨 껍질이 하얗게 마를 즈음, 나랑 동생들은 그걸 까먹으며 간식으로도 먹고, 팽이 돌리기도 하면서 놀았지.”
엄마는 호박은 줄기처럼 썰어 햇볕에 잘 말려 두었다가 한겨울 추운 날, 귀한 찹쌀을 조금 넣고 밀가루와 미리 불린 동부콩을 넣어 푹 끓여주셨단다. “그러면 아주 맛있는 호박죽이 됐지.” 그렇게 이야기하며 내가 건네주는 인스턴트 호박죽을 훌훌 떠 먹곤 했다.
어느 한여름날, 00씨는 또 겨울옷을 입고 맨발로, 늘 들고 다니던 낡고 망가진 가죽 가방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고 아주 조용히, 은밀하게 말했다.
“레지나 씨, 우리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해요.” 그래서 내가 사무실 상담실로 안내하니 00씨는 말했다. “레지나 씨, 문 닫아요. 혹시라도 다른 직원이 들으면 질투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지나 씨, 나 한국에 대통령이 되었어요. 이제 곧 한국으로 가야 하는데 레지나 씨를 꼭 내 수행비서로 데리고 가고 싶어요. 월급은 얼마나 주면 될까요? (계속)
소셜워커, 워싱턴가정상담소 소장
이메일: regina.chae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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