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선
수필가, 월간 <수필 문학> 등단
미주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부분) 당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 수필집 '길 없는 길 위에서' |
그날 우리 일행은 LA 한인타운에서 아침 9시경 낯설고 무섭다는 멕시코를 향해 다소 무모한 여행 길에 올랐다. 2년 전 LA로 가족여행 떠나면서 이번엔 멕시코 여행을 꼭 하리라 단단히 별렀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가자마자 신종풀루로 야단도 아니다. 그 다음에도 또 다시 LA에 갔지만 멕시코는 무서운 나라라고 옆에서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접었다. 그래서 LA 여행을 수없이 하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며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하기야 나도 신문에서 종종 그 나라가 치안에 문제가 있다는 기사를 봤다. 나 또한 강심장이 아닌 바에야 꼭 가야만 하는 건 아니지 싶다. 그래도 여행을 즐기는 난 기회만 있으면 언젠가 한번은 라틴 아메리카 문화와 역사를 조금이라도 돌아보고 싶었다.
일기예보엔 비가 많이 오리라 했지만 우리는 그냥 떠났다. 빗속에서의 여행또한 운치가 있지않을까 하는 나이에 맞지않는 막연한 낭만을 품고서. 샌디에이고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니 기상통보관 밥줄 잘릴까 그랬는지 비가 제법 내린다. 다시 3~4십분 남쪽으로 더 달려 국경선을 가뿐하게 통과했다.
건너가서 바로 있는 도시가 서울 이태원을 방불케 하는 말로만 듣던 풍물시장이라는 티화나. 어디나 그렇지만 선물가게가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길게 늘어섰다. 거기다가 마치 종로 5가 약국처럼 대형 약국들이 즐비하다. 제약 기술이 뛰어나고 값이 저렴할 뿐더러 처방이 필요 없어 미국에서 약 사러 건너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아예 약국 앞엔 호객꾼이 붙박이로 서있다. 안내자는 멕시코에서 물건 사는 요령을 일러줬다. 마치 옛날 어머니들 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가격을 물어보고 반으로 깎고 안 산다고 돌아서고 하다 보면 값이 내려간단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옛날식 흥정이다. 그러나 난 흥정엔 소질이 없으니 어쩌나.
조카에게 작은 기념품을 사주고 싶어 이것 저것 살펴보다가 작고 귀여운 숄더 백을 하나 발견했다. 조카는 예쁘다고 한다. 멕시코는 소가죽이 흔한 나라라더니 통가죽으로 만든 가방이 길들면 좋을 듯싶다. 상인은 얼른 쫓아오더니 22달라라고 한다. 나는 아이에게 진짜 좋아하는지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는 혼자서 값을 낮춘다. 아이 찾으러 갔다 오니 또 값이 내려갔다. 재미 있는 현상이지 싶다. 난 입도 뻥끗하지 않았건만 반도 더 깎여 10달라고 한다. 주인은 혼잣소리로 “오늘은 비가 와서 손님이 없어서”라고 한다. 그 소리가 왜 그리도 애잔하게 가슴을 울리던지 얼른 사고 말았다. 조카는 좋아하면서 제가 몇 년간 쓰다가 제 조카에게 물려주겠단다. 소견이 말짱하다.
우리는 다시 바하 칼리포니아 청정해역을 따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표현하기 어려우리 만치 아름답고 깨끗한 바다는 하얀 옷차림으로 들어서면 그대로 짙은 쪽빛물감이 곱게 물들 것만 같다. 그 바다엔 일본회사 소유의 참치양식장이 여러 곳에 있다. 양식도구 하나만해도 백만 달라를 족히 한다니 그 규모가 참 대단하다. 작은 배가 먹이를 주러 부지런히 들락거린다. 수확한 참치는 전량을 토쿄 어시장경매장으로 직송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야 문명의 시발점이라는 멕시코엔 아스텍 문명 또한 공존했었다. 아스텍인들은 그들의 신들이 자신들의 몸을 희생하여 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 했다고 믿었다. 이렇게 창조된 우주가 지속적으로 그 생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 역시 자신들을 희생하여 그 심장을 신들에게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1521년 아스텍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군대는 태양석을 상징하고 있는 아스텍인들의 믿음체계를 파괴하고 자신들의 믿음 체계인 기독교를 전파시키기 위해 태양석을 현재 멕시코시티의 대광장에 묻어 버림으로 아스텍 문명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멕시코는 풍부한 천혜의 자원을 가진 나라다. 또한 권투, 축구, 프로 레슬링, 투우가 4대 국민 스포츠다. 우리가 들어서 이름을 잘 알고 있는 술 데킬라는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다. 32도라는 다소 높은 도수의 그 술은 파인애풀 같이 생긴 선인장 열매로 담근단다. 멕시코 시티엔 세계에서 공연장, 극장이 제일 많으며, 1인 작품의 거대한 벽화가 있단다. 안내원이 어찌나 열심히 멕시코를 좋게(?) 설명하는지 마치 그는 멕시코라는 나라 홍보대사가 아닌가 싶다. 내가 멕시코 대통령께 편지를 써서 ‘안내자에게 시상을 하도록 해야겠네’ 해서 일행은 한바탕 웃었다.
사실 사람이라는 것이 선입견이라고 할까, 이미 인식하고 있는 생각을 바꾸는 일이란 참으로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닌데. 무조건 개인 여행은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해서 우리는 단체 여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단체 여행이라서인지 전혀 무섭다거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한 이번 여행에서 막연히 ‘그들을 게으른 사람, 또는 교육수준이 낮은 건 아닐까’ 했던 생각이 전부 잘못된 정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써 이젠 완전히 그들을 보는 시각이 교정 되었다. 잘 살수 있는 조건을 가진 나라인데 다만 정치를 잘못해서 국민이 고생을 하는 거란다. 백번 이해가 가는 말이다.
엔세나다 도심엔 깔끔한 선물 가게들이 즐비하다. 거리엔 관광객들이 청하는 대로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 향수를 달래주는 거리의 악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는 그 길로 포장마차에서 비를 맞으며, 지금까지 먹었던 그 어느 타코보다 더 맛난 소프트타코를 하나씩 먹었다. 이 나라에 왔으니 멕시코 음식문화를 알고자 마거리타라는 칵테일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엔세나다는 준 사막지대라고 한다. 준 사막이라는 뜻은 년간 강우량이 200ml을 조금 넘는 걸 말한단다. 그리고 그 이하일 때는 사막이라 정의한다.
우린 앤세나다에서 하루 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 퍼붓는 빗소리를 들으며 시간이 없어 보던 책을 더 읽다가 내일을 위해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찬란한 태양이 반긴다. 그러면 그렇겠지 하고 또 남쪽으로 한 시간 가량 더 내려갔다. 그곳엔 라푼파도라라는 작은 관광지가 있다. 어쩌면 하늘과 바다가 친구인양 똑 같은 남빛으로 치장하고 있다.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서질 때마다 무지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선인장 사진을 찍는데, 댓 살 난 사내아이가 손을 내밀며 캔디캔디 한다. 나는 얼른 박하사탕 한 알을 찾아줬다. 불현듯 우리네 지난 세월이 아프게 스치고 지나간다. 우린 그곳에서 맹고와 계피 추로(Cinnamon Churro)도 맛나게 먹었다. 아이가 다시 와서 또 캔디캔디 한다. 나는 다시 또 박하사탕 한 알을 더 찾아줬다. 그런데 장사하는 할아버지가 달라고 손을 내미니 아이는 선뜻 건네준다. 어쩌면 그 아이는 꼭 먹고싶어서라기보다 그저 습관적으로 그러는 게 아닌가 싶다.
돌아오는 길 산 안토니오 분지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이번 여행중 제일 괜찮은 음식 같다’고 하니 안내자도 ‘그렇지요’ 한다. 그곳엔 아름다운 화초와 아무도 손댄 흔적이 없는 유실수엔 오렌지 열매가 다닥다닥 달려 익어가고 있는 게 퍽이나 풍요롭다. 순간 이번 여행을 베풀어준 여동생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때를 놓친 장닭의 홰치는 소리가 욕심없고 느긋한 이 나라 사람들만큼이나 느리게 들려 절로 낭만에 젖어 든다.
시간관념이 희박한 그들은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내일이 가면 모레가 또 올 것이니 지구가 돌고 도는데 뭐가 그리 급하냐’ 한다니 평화가 따로 없지 싶다. “16세기에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인에게 유토피아였다”고 말하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파블로 네루다, 에르네스토 사바토이스의 말이 생각나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애틋함이 가슴에 애잔하게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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