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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09/15  조이시애틀뉴스
[김수영 이야기] 별난 인연도 인연이다

어느 날 사무실 문을 열고 장군처럼 건장한 두 남성이 들어왔다. 동부에서 이미 부동산 업계 경력을 쌓은 간부급 베테랑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과 함께 일하게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말 그대로 ‘장군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4성 장군을 지냈고, 당시 이탈리아 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입사한 지 몇 달 뒤 아버지를 만나러 이탈리아에 다녀왔다며 바티칸에서 교황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집안 배경만 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성격도 착하고 순한 사람이었다.

어느 한가한 날,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군이었던 아버지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고 자녀 교육도 군대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막내아들은 공부보다는 장난과 여행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중학생 무렵에는 가방 하나를 메고 혼자 부산과 제주도까지 전국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마지막 날 새벽, 가족들이 깰까 봐 발뒤꿈치를 들고 살며시 집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빵!” 총소리가 났다.

기겁을 하고 내려다보니 총알이 엄지발가락 바로 앞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권총으로 쏜 경고탄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와, 이 집은 자녀 교육에 총알까지 날아오는 집이었구나.’

그것도 끝이 아니었다. 공부는 하지 않고 가출해 돌아다닌다며 화가 난 아버지는 막내아들을 옛날식 변소에 세워두는 벌까지 주었다고 한다. 구더기가 다리를 타고 올라오고 무릎까지 발갛게 부어오르는 공포 속에서 어린 아들은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온 가족에게 미국 여행을 가자고 했다. 미 동부 여행을 모두 마친 뒤였다. 장군 아버지는 막내아들을 따로 앉혀 놓고 3천 달러를 건네며 말했다고 한다.

“너는 사람이 되려면 고생을 해봐야 한다. 이 돈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스스로 살아남아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아들을 홈스테이 가정에 남겨둔 채 가족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중학교 2학년이었다. 하루아침에 미국에 홀로 남겨진 그는 도넛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동네 집의 페인트칠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고 한다.

그렇게 외롭고 힘든 미국 생활을 견디면서도 고등학교 시절 만난 첫사랑과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당시 한국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미 육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몇 년 뒤 그는 우리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동부로 떠났다. 그리고 거의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LA에서 열린 부동산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 옛날 자유분방했던 ‘장군의 아들’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의젓한 중년 신사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부동산 회사를 차리기 위해 세미나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장군 아버지의 교육 방법이 옳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을 가르치는 가장 무서운 선생님은 결국 세월과 삶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회사를 운영하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벨뷰로 이사 오는 상사 주재원이나 항공사 직원, 총영사관 관계자들이 시애틀로 부임하면 임시로 살 집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았다.

사실 부동산 중개사들에게 임대주택을 찾아주는 일은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품은 많이 들지만 돌아오는 것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고객 서비스이고, 워싱턴주에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지역을 소개하는 일종의 봉사라고 생각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가정이라면 학군까지 살펴가며 벨뷰와 주변 지역의 집을 찾아주고 학교 입학을 돕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럽 근무를 마치고 시애틀로 부임한 한 고위 공직자 가족이 벨뷰에 집을 구해달라고 했다. 조건은 월세 3천 달러 이하.

당시에도 그 가격으로 벨뷰에서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집을 볼 때마다 사모님의 요구사항이 하나씩 늘어났다.

“이것도 바꿔주세요.” “저것도 고쳐주세요.” “여기는 전체를 리모델해야겠네요.” 듣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분이 집을 빌리려는 것인지, 새집을 한 채 지으려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집을 찾는 편이 좋습니다. 집주인이 이 모든 것을 고쳐주거나 요구사항을 전부 들어주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쉽게 받아들이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생활방식과 미국의 임대문화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예전에 함께 일했던 ‘장군의 아들’ 생각이 났다. ‘아… 사람을 만나다 보면 별별 일을 다 겪는구나.’

집 보기를 모두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원하시는 수준의 집을 찾아드리기에는 실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보다 더 훌륭한 분께 부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몸에 밴 생각과 문화를 내가 짧은 시간에 설명하고 바꾸려 한다면 서로에게 힘든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쯤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얼마 후 그 가족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직원들이 모인 파티에서 누군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가라오케에서 대중가요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그분이 한마디 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유행가를 부르느냐. 클래식을 불러야지.” 클래식을 전공한 분이었다니 어쩌면 그분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기준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살아오면서 한 가지를 배웠다. 사람의 품격은 내가 어떤 노래를 부르느냐보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노래도 즐겁게 들어줄 수 있는 배려와 마음의 폭에 있는 것이 아닐까.

장군의 아들도, 그 가족도, 그리고 나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왔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돌아보면 모두 한때 내 삶의 길목에서 만나 잠시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조용히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조금씩 알 것 같다.

좋은 인연에게서는 따뜻함을 배웠고, 어려운 인연에게서는 사람을 배웠으며, 별난 인연에게서는 세상의 넓이를 배웠다. 인연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삶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한 줄의 이야기가 되어 마음속에 남는 것.

그래서 별난 인연도, 결국 인연이다.



김수영 
힐릭스부동산 대표
전 평통 시애틀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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