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에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 인민군이 완전히 와해되고 국군과 UN군은 적의 별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북진을 계속하였다. 동부전선에서는 미제10군단장 애드워드 알몬드 소장과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 예하부대가 한만(韓滿)국경 도시 혜산진에까지 진출하였고 서부에서는 미8군예하 국군 6사단 7연대가 역시 한만국경 도시 초산에 도달하였다.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둔 이 시점에서 예기치않았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UN 군은 부득이 후퇴작전을 택하게되었으며 이와중에 전선 일대에서 엄청난 병력과 무기와 물자 손실을 입게 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미제1해병사단은 장진호전투 에서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흥남부두에는 한미 군병력 10만 외에 민간인 피난민 10만이 운집하여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외에 각종무기. 차량, 보급물자를 남한의 안전지대로 이송할 계획이였다. 1950년 12월 15일에 시작한 철수작전은 24일끼지 계속됐으며 그중 피난민 승선 문제가 한미간에 큰 문제가 되었었다고 한다.
알몬드 미9군단장은 민간인 피난민의 승선과 후송을 반대했으나 그당시 알몬드 장군의 통역관을 담당했던 현봉학 박사와 김백일 국군 1군단장의 집요한 설득으로 그많은 피난민을 무사히 거제도로 후송하게 되었다. 그때 흥남부두를 떠난 200여척 선박 중 마지막으로 떠난 7,500톤급 “메레디스 빅토리”호가 그많은 피난민을 태우고 부산을 거쳐 거제도에 도달했다. 기록에는 그당시 피난민수가 9,800 또는 14,000명으로 기록되어있어 정확한 피난민 숫자는 알 수 없으나 그배에 실려온 총 인원수가 약 14,000명 이였음은 사실인듯하다.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일반상선이였으나 제2차대전 중 군용선으로 전용되었는데 한국 전에 다시 군수물자 운반선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여기서 잊지못할 인물이 있는데 그는 이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인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이다.
“레너드 라루” 선장 이름은 별로 알려진바가 없다. 그러나 이분의 흥남 철수작전에서 피난민 구출을 위한 필사적인 활약과 공로는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일단 군 지휘부 에서 피난민 승선이 허락되자 “라루” 선장은 혼신을 다하여 숭선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선상의 자리가 부족해지자 “라루”선장은 이미 적재되어 있던 일부 무기와 물자를 바다에 내던지고 그자리에 피난민을 승선시켰다.
이 얼마나 용감한 결단이였던가! 7,500톤이란 비교적 작은 상선에 14,000명의 피난민을 싣고 그 혹한 속에서 28시간 항해 끝에 한명의 낙오자 없이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하였다. 그후 이 배는 “기적 의배”로 알려지게 됐고 이 철수 작전은 역사상 인류애를 발휘한 최대 구조작전 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현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의 양친도 이배를 타고 남하했으며 거제도에 도착 2년 후 문재인 대통령이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1952년 4월, 6.25전쟁 중 필자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포트실(Ft. Sill)l에있는 육군 포병 학교에 초등군사반과정 이수차 20,000톤급 미군 병력수송선을 타고 17일간 걸려 태평양을 건넌적이 있었다. 그당시 이 수송선에는 약 4,000명의 귀국 미군장병이 타고 있었는데 이 수송선의 승선 인원수와 7,500톤 메레디스 빅토리호에 승산한 피난민 14,000명을 비교하면 흥남철수작전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라루선장은 선장직을 떠나 뉴저지주 뉴턴시에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에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도승이 되어 평생을 이곳에서 봉헌하였으며 2001년 10월 14일 87세의 나이로 고귀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라루 선장이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다. 아마도 그가 흥남 철수작전에서 겪은 인간세상의 참혹한 광경에 환멸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결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라루선장은 그의 회고담에서 흥남철수시의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무사히 거제도로 인도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너무나 겸손하고 독실한 믿음과 인류애의 소유자인 라루선장의 숭고한 정신과 그의 의미신중한 고백에 무한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미국과 한국정부로 부터 포상도 받았으나 결코 표면에 나타내지않았다. 2004년에 그가 선장으로있던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배 한척에 그많은 피난민을 싣고 그많은 인명을 구조한 역사상 최대 구출 작전을 수행한것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흥남철수작전에서 라루선장이야말로 막후의 위대한 영웅이며 피난민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기도하다. 고로 필자는 그를 흥남 철수작전에서의 일둥공신으로 추대한다.
추가로 여기서 한토막 일화를 소개하겠다. 위에 언급한 한만국경도시 혜산진은 필자가 1930년대 중반에 유년기를 보낸곳이기도 하다. 선친이 그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 후 혜산진 도립병원에 취업발령을 받고 가게된 곳이다. 한가지 기억 속에 남는 것은 병원에서 보내온 자동차를 타고 함흥에서 출발하여 혜산진으로 가는데 산넘고 물건너 험한 길을 한없이 갔던 것이 생각난다. 지도상에서 찾아보니 그곳이 바로 유명한 삼수갑산 오지 였음을 알게 됐다.
또다른 일화는 중국 장춘에서 조선족자치주에있는 연길로가는 밤기차 속의 4인용 침대칸 속에서 우연히 흥남철수작전에서 피난민 후송에 큰 역할을하신 현봉학 박사를 만난 것이다. 그때 그분은 미국 필라델피아 토마스 재퍼슨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였으며 연변의과대학(의학원)를 돕기 위해 방문하는 길이라고 자기 소개를 해주었고 필자 역시 연변농과대학(농학원)의 초청으로 방문하게 됐다고 인사말을 건냈다. 알고보니 현 박사와 그당시 매릴랜드주에서 의업에 종사하셨던 필자의 숙부님과도 친교가 두터운 사이였음을 알게되었다.
그당시의 필자는 현봉학이란 이름을 들은적은 있었지만 그날 필자와 마주앉은 분이 흥남 철수작전 때의 현 박사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 알수가없었다. 잠시 망서리다가 용기를 내서 화제를 흥남철수 이야기로 돌려보니 바로 그분이 현 박사였음을 알게 됐다. 넓고 넓은 중국 이역땅에서 현박사를 만나게될 줄이야 전혀 예기치못한 사건이였다. 필자는 현 박사와 취침 전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현 박사는 흥남철수 당시에 관한 언급을 극히 자제하는 모습이여서 더이상 자세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필자는 그후 그의 회고담에 “흥남철수작전에서 수많은 피난민을 구출하는데 공헌을 하였지만 그 도움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라는 일종의 자책감을 나타내는 기사를 보고 그제서야 연길행 기차침대칸에서 현박사가 흥남철수 작전에 관해 말을 아꼈던 이유를 알게되었다. 현 박사는 생전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2007년 11월 25일 뉴너지주의 한 병원에서 85세를 일기로 이세상을 떠나셨다. 현봉학 박사 또한 라루 선장과 함께 칭송받을 위인임에 틀림없다.
윤영목
농생물(병충해)학 박사
서북미 6.25 참전국가유공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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