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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7/03/20  조이시애틀뉴스
[기획특집] "6.25는 생애의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윤영목 회장


윤영목 오레곤 6.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


포틀랜드에 거주하는 윤영목(83) 오레곤 6.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은 6.25전쟁 발발 65년을 맞이하는 감회가 남다르다.


윤 회장은 "전쟁 3년, 전후 3년 등 6년간의 군생활은 나에게 용기와 지혜를 얻게 해주었으며 국가존망의 위기상황에서 구국성전에 참여,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일조한 것은 나의 80여년 생애에서 그무엇보다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라고 말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유학길에 나선 그는 1957년 시애틀에 도착, 워싱턴주립대학(WSU)에서 원예학을 공부하다 오리건주립대학(OSU)으로 옮겨 농생물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자신을 아껴준 교수의 추천 덕분에 미시건주립대학 대학원 과정에 입학, 원예학과 농생물(병충해)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콜로라도 농업연구소 연구원으로 시작, 농생물 병충과장으로 은퇴하기까지 30년간 농생물 전문가로 활동했다. 1996년 은퇴 후 두 딸이 살고 있는 시애틀로 이주한 윤 회장은 박남표 예비역장군과 함께 서북미 6.25참전유공자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으로 4년간 단체를 이끌었다. 당시 워싱턴주의 한국전 참전용사는 1백명이 넘었다. 


딸과 사위가 오리건주로 이사하는 바람에 윤 회장은 정들었던 시애틀 생활을 접고 2006년 포틀랜드로 이주했다. 그는 한국전 참전용사 50여명이 있는 오리건에서도 6.25참전 유공자회를 설립, 회장직을 맡아 미군 참전용사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윤 회장은 과거를 회상하며 "1950년 당시 18살로 경북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6.25가 발발, 군에 입대 1950~1956년까지 포병장교로 3년, 전후 3년 복무하고 1957년 소령 예편과 동시에 도미 유학길에 올랐으니 금년이 도미 58년이 된다"고 말했다.


윤 회장은 "6.25전쟁 3년 1개월간 계속된 처참한 전쟁으로 남북 쌍방이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은 가운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총성은 멈췄으나 전쟁 그자체는 종결되지 않은체 62년이 흘러갔다"고 말했다. 


1950년 전쟁발발 2개월후인 8월에 18세 나이로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1포병단에 자원 입대한 그는 간부후보생 모집에 응시, 그해 9월에 동래소재 전시 장교 양성소였던 육군종합학교에 입교, 3개월간의 혹독한 훈련을 받고 그해 12월에 '자랑스러운' 육군 포병소위로 임관됐다.

 

바로 전투에 배치된 윤 회장의 부대는 당시 평안북도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포병 제18대대에 배속돼 후퇴를 해야하는 상황을 맞았다.


당시의 안타까운 사연도 소개했다. 안동에 주둔하고 있을때 소속 포대에서 탈영병 사건이 발생했다. 상주가 고향인 이 병사는 안동에서 도보로 상주까지 달아나 선임하사가 데려왔으나 얼마후 또다시 탈영, 이같은 일이 3번 반복되자 대대장은 직결처분권으로 전부대원을 소집하여 그 앞에서 총살형을 집행했다. "처음보는 총살형 광경에 흐느껴 우는 병사도 있었고 전쟁을 실감 할 수 있는 엄숙한 장면을 경험했다"고 회고했다.

 

윤영목 회장이 워싱턴주올림피아에서 열린 6.25 기념식에 참석,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만나 과거를 회상했다.


그후 당시 미개지 설악산을 거쳐 1951년 8~9월에는 중부 김화-철원지구의 철의삼각지 735고지전투에 참가, 종합학교 9기동기인 육군제2사단, 32연대, 2대대, 7중대장으로 735고지 방어임무를 수행하고있던 김영국 중위를 만나게 됐다. "우리 포병 대대가 2사단을 지원하게 됐고 나는 포병 관측장교로 2대대 OP(관측소)에 파견돼 735고지의 김영국 7중대 전면의 엄호지원 임무를 맡게됨으로 우리 둘은 이곳에서 끊치못할 혈연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해 9월 1일 해가 저물자 중공군 1개연대 병력이 인해전술로 735고지에 총공격을 감행, 공군과 포격지원이 어려운 야간전투에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중공군은 김영국 중위가 지휘하는 7중대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고지 정상까지 접근해왔다.


김영국 중대장의 직속상관인 2대대장은 계속 사수명령을 내렸고 자정이 지나자 김영국중위는 중공군이 정상까지 침투, 백병전이 전개됐음을 2대대장에 보고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김 중위는 "나와 중대원의 생사에 개의치말고 735고지 정상에 일제 포사격을 해달라”는 최후의 요청을 했다. 윤 회장은 "이 얼마나 처절하고 비장한 결단이었겠나? 결국 김영국 전우는 이같은 마지막 한마디를 나에게 남기고 적진에 돌진, 장렬히 전사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윤 회장에 따르면 그후 김영국 중위에게는 한미 양국 대통령과 8군사령관의 표창장, 한미무공훈장, 1개급특진등 포상이 수여됐고 육군전사에 호국영웅으로까지 추대되었다.


1956년 6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소령으로 예편과 동시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6년간 복무중 9개부대를 전전했으며 도중에 미국육군포병학교에서 파견교육도 받고 포병확장 계획에 따른 신설부대 창설요원으로도 활약했다고 밝혔다.


윤 회장은 "우리 6.25세대는 우리 나름대로 나라를 위한 의무를 다했으며 이제 얼마남지 않은 여생길을 걸어가고 있다"며 "이제 나라의 앞날은 후세들의 손에 달려있으니 애국애족정신을 잊지말고 최선을 다해달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윤 회장의 공적을 인정, 2013년 박세환 재향군인회장과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그동안 한미친선과 우호증진 노력에 대해 공로표창장을 수여했다.

 

기사/사진=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조이시애틀뉴스 기획취재팀
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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