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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다호주 쿠어달린에 살고 있는 리차드 시워드 씨가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에서 숨진 병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책을 보여주고 있다. |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에 접어든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혹독한 추위 속에 17일간 수만명이 전사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Chosin Reservoir Campaign)'에서 생존한 미군 해병대 참전용사가 아이다호주 쿠어달린에 살고 있다.
주인공은 1950년 8월 당시 20살의 나이에 일등병으로 한국전에 파병된 리차드 시워드(85). 장진호 전투는 3만여명의 미국이 투입돼 중공군과 사투를 벌일 끝에 3천여명만 남아 퇴각한 미군 전쟁사에 기록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장진호 전투는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지금까지 65년을 함께 해온 부인 조이 시워드 씨와 함께 쿠어달린의 한 작은 주택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고 있는 그는 "장진호 전투는 전우의 시체를 밟지 않고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로 전사자가 많았다"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고 말했다.
시워드는 장진호 주변에 주둔해 있던 미군 1만5천여명이 갑자기 밀려온 12만여 중공군에 둘러싸여 고립된 가운데 격렬한 전투를 벌이며 일부 군인들이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에 섭씨 영하 40도까지 떨어진 전선의 매서운 추위 속에 동상에 걸리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시워드 자신도 발가락이 심한 동상이 걸려 수개월 뒤에 부상으로 제대, 미국에서 치료를 받으며 동상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는데 무려 10년이나 걸렸다.
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퇴각한 시워드는 그해 8월 17일 낙동강 전투에서 또다시 치열한 전투를 경험했다. 자신의 소대원 23명이 북한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6명만 살아남았다는 시워드는 "물위에 시체가 떠다니고 강물은 핏빛에 물들었다"고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전했다.
그는 낙동강 전투지에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아 군함을 탔다. 그해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 북한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미군은 1군단을 원산과 흥남으로까지 진격시키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 시워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원산에 주둔할 당시 미국의 전설적인 코미디언이자 배우였던 밥 호프가 원산으로 위문공연을 와 그를 볼 수 있었다며 "밥 호프는 당시에 원산을 찾은 유일한 미국 민간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워드씨는 한국전이 한창인 1951년 3월 발가락 동상이 심해지면서 부상병으로 귀국,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직후에 버뱅크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어온 동창과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캘리포니아에서 해병으로 계속 근무하며 베트남전에도 참전한 역전의 용사인 시워드는 26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1976년에 제대, 샌디에고에서 살며 보험에이전트 겸 투자자문사 일을 했다.
시워드가 1996년 샌디에고에서 이주해온 쿠어달린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군 참전용사 10명이 살았는데 현재는 그를 포함해 3명만 생존해 있다.
1971년 블루 이글 전투비행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는 6.25 당시에 전투를 벌였던 경기도의 한 고지를 가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운전사에서 오래된 지도를 보여주며 요청을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았고 시애틀총영사관을 통해 한국정부가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주는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기도 했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기사/사진=아이다호주 쿠어달린에서 조이시애틀뉴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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