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지은 농가월령가 '정월령(正月令)'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다.
정월은 맹춘이라. 입춘 우수 절기로다./ 산속 골짜기에 빙설은 남았으니/ 농기를 다스리고 농우를 살펴 먹여/ 재거름 재워 놓고 한편으로 실어 내니/ 보리밭에 오줌주기를 힘써하라./ 사내 아이 연 날리기, 계집아이 널뛰기/ 윷놀이 내기 하니 소년들 놀이로다/ 움파와 미나리를 무 싹에 곁들이면/ 보기에 신선하여 오신채를 부러 하랴./ 보름 날 약밥제도 신라적 풍속이라/ 묵은 산채 삶아내니 육미와 바꿀쏘냐./ 귀 밝히는 약술이며 부스럼 삭는 생밤이라/ 먼저 불러 더위팔기 달맞이 횃불 켜니/ 옛날부터 전해내려 오는 풍속이요. 이이들 놀이로다./
이 월령가를 가만히 읽어 보면 농경사회에 살던 우리 조상들의 자상한 생활의 지혜가 묻어있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긴 겨울 동민(冬眠)의 세월을 보내고 ‘설’을 맞이했다. 새 옷 입고 제사지내고 세배 다니다 보면 금방 정월대보름 명절을 맞았다.
2월11일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한 해의 안녕과 복(福)을 기원했다. 지금까지 정월 대보름에 전해 내려오는 풍속 가운데 가장 보편화된 것은 오곡밥, 묵은 나물과 부럼 등 음식이다. 이 정월 대보름날의 절기 음식은 겨우내 부족한 영양소를 섭취하고 신진대사를 좋게 하기 위한 것들로 현대 과학으로도 그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정월 대보름 하루 전 날인 14일 저녁에 누님과 고모의 짓궂은 장난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정월 14일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속어(俗語)가 있다. 어린 동생들도 알고 있었다. 6남매의 맏인 나는 위로 누님과 고모와 공모하여 동생들을 놀라게 하려고 야심한 밤에 고모와 누나는 쌀가루를 물에 개여 곤히 잠자고 있는 어린 동생의 눈썹을 하얗게 칠했다. 한참 크는 나이에 고단하여 세상모르고 잠자는 여러 동생들의 눈썹분장을 하며 얼마나 깔깔대고 웃었는지 모른다.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부스스 깨어난 동생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어제 저녁 뜬눈으로 지새웠으면 이렇게 눈썹이 세지 않을 거라고 후회하는 동생이 있었고 형인 나는 세수하면 금시 없어진다고 달래 주었다.
정월대보름의 추억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눈썹분장보다도 신나는 쥐불싸움이다. 정월 대보름이면 논둑이나 밭둑에 불을 놓았다. 이것은 잡초를 태움으로 쥐와 해충을 방제하고 태우고 남은 재(칼륨)로 농사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정월 대보름 날 저녁 동산에 양푼만한 둥근 달이 얼굴을 내 밀면 마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동구 밖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각자 달님에게 새해 소망을 빌고 짚, 대나무 등으로 만든 ‘달집’을 태우며 액막이도 하고 1년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우리 어린이들은 이런 마을 행사는 건상으로 생각하고 깡통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솔방울이나 관솔을 가득 채운 후 불을 붙였다. 철사로 끈을 매어 큰 원으로 빙빙 돌리면 솔방울 타는 불이 타원을 이루며 허공 속에서 긴 곡예를 펼치며 장관을 이루었다. 우리는 신이 나서 계속 돌리며 앞 논둑을 향해 망아지처럼 달려갔다.
이미 논둑 마다 선발대로 미리 도착한 이이들에 의해 놓은 쥐불은 뱀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듯 타면서 번져나갔다. 푸른 달 빛 아래 빨간 불이 깜박이며 타들어 가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불빛이 푸른색이었더라면 영락없는 도깨비불이었을 것이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초저녁이면 이곳에서 건너 마을 애들과 쥐불싸움을 하였다. 싸움에 패하는 마을은 1년 내내 염병(染病)을 앓고 농사도 흉년이 든다는 속어(俗語)가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나 우리 마을은 ‘송골’이란 건너 마을과는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추석 면민 운동대회 때 부락대항 청년 100m 결승전이나, 풍악 놀이 농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놓고 해마다 각축전을 벌려오곤 했다.
해가 지고 1년 중 가장 크다는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우리 애들은 서로 모여 잠시 뒤에 있을 쥐불 싸움의 작전계획을 짰다. 만약에 싸움에 질것에 대비하여 청년들 수 10명을 뒤편 후미진 곳에 매복하여 두었다.
드디어 건너 마을 동리에서 쥐불을 놓아가며 서서히 우리 진영 쪽으로 싸움꾼들이 몰려왔다. 초등학교 애들이 앞에서고, 좀 큰 애들이 뒤서고, 청년들이 맨 뒤에서 깡통을 돌리고 가느스름한 지팡이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쳐들어왔다.
우리는 숫적으로 열세하였다. 또 힘도 부족했다. 난 나보다 훨씬 큰 형들에게 얻어맞았다. 우리는 서로 치고 받으며 싸웠다. 순식간에 논바닥은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이 때였다. 이렇게 얻어맞고 쫓기는 우리들을 구하려고 숨어 있던 우리 편 청년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전쟁터로 달려왔다.
마음 놓고 도망치는 우리를 추적하는 건너 마을 애들은 난데없는 복병에 혼비백산하여 저희 동리로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쳐 버렸다. 우리는 도망가는 적을 따라가다가 승리의 기쁨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어른들에게 쥐불 싸움에서 우리 마을이 이겼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잖아도 궁금하시던 어른들은 “올해는 풍년들고 염병(染病)도 없을 거라”고 기뻐하셨다. 집에서는 윷놀이가 한창이었다. 박달나무 윷이 쟁그랑하고 부딪치면서 떨어지고 이어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와 함께 이긴 편은 모두 얼싸 안고 승리의 기쁨에 도취하여 춤을 추었다.
정월 대보름이면 불타는 깡통을 허공 속을 휘저어 힘껏 돌리면서 쥐불싸움을 하던 아득한 어린 시절의 그 신바람 나던 패기가 그립기만 하다. 지금 애들은 동화에서나 들어보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이성수
수필가, 서북미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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