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9년 2월 15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도 이슬은 반짝이다 우주 속으로 스며든다.
지난해 7월 갑자기 진보정당의 대표정치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노회찬 의원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조문객이 길게 줄을 이었다. 그의 유작들을 살펴보니 꿈꾸던 정책과 명연설과 그리고 추천도서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이 한동안 베스트셀러로 광풍을 몰고 다닌 때를 기억한다. 그 시기 필자는 ‘왕조실록’이란 제목에서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 이번에 故 노의원이 추천한 책이란 것을 알게 되자, 이 책이 뭔가 뼈대가 분명한 남다른 왕조실록 책일 것 같았다.
우리 대한민국의 바로 전 나라였던 ‘조선’을 한 권의 책으로 잘 꿰뚫어 볼 수 있다면, 2019년을 사는 한국인으로서 그보다 유익한 지식자료가 어디 있으랴! 요즘 복원되고 있는 서울의 각종 조선시대 유적을 이해하는 데도 식견을 갖고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박영규 지음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1996년 초판이 발행되어 2016년까지 300쇄에 200만 부가 팔린 역사분야 밀리언셀러다. 판을 개정하면서 독자와 소통하여 책이 더 두꺼워지고 내용이 세밀해지고 있다. 이 책이 독자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정교하고 맥락이 살아 있으면서도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콘텐츠의 힘’ 덕분이라는 출판사의 리뷰가 인상적이다.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조선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지극히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사회가 아니라, 대단한 정열과 무게가 내재된 깊이 있는 세계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조선 사회와 왕조를 찬양하는 것도 견해를 강요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그 세계 속에 새로운 어떤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기도 전에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과 그 이후 강제된 서구문명으로 인해 너무나 쉽게 그 세계를 놓쳐버렸다’라고 하여, 역시 베스트셀러답게 서문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책 뒤에 부록으로는 ‘조선시대의 정부기관’, ‘내명부와 외명부’, ‘실록에 나온 인물찾기’가 있고, 마지막으로 뒷장에, 조선왕조 27대 519년(1392~1910) 동안의 세계도(世系圖)가 8쪽 크기 한장의 도표로 정리되어 있다. 이것 한 장만 있으면 조선시대 왕과 부인들과 자녀 수, 왕위 승계관계 등을 연도와 함께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으니 유용 면에서도 탁월하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무척 흥미롭다. 예를 들면, ‘한글’은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기습공표했다든지, 왕은 화장실을 가지 않고 시녀들이 일종의 이동식 변기를 가지고 다녔다든지, 세자는 아무 권력이 없었으나, 궁녀들이 어린 시절 세자의 친구가 되어 주고 후궁으로 삼을 수 있었다든지, 왕과 왕비, 세자 등의 일과 생활에 대해 처음 안 것도 많다.
개인적으로 조선시대와 현재의 같은 연령의 다른 생활을 비교해보며 궁궐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해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과거 중국 문화권 국가에서는, 남자는 8년을 주기로, 여자는 7년을 주기로 크게 변한다는 학설을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는 8세에 처음으로 성에 눈을 뜨고, 16세에 성적인 기능을 가지게 되어 자식을 볼 수 있으며, 24세에 성장이 완료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7세에 성에 눈을 뜨고, 14세에 아이를 잉태할 능력을 가지게 되고, 21세에 성장이 완료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생겨난 말이 ‘남녀칠세부동석’이다. 즉, 여자가 7세에 성에 눈을 뜨게 되므로 7세 때부터는 남녀를 함께 놀게 하거나 같은 방에 재우지 않았다’고 한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원자는 8세가 되면 세자에 책봉되었다.
장희빈(1659~1701) 일화로 유명한 조선 제19대 숙종(1661~1720)은 14세 때 섭정 없이 바로 친정을 시작했으며 45년 11개월간 재위하여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9명의 부인에게서 8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과 4남이 각각 경종(제20대, 1688~1724)과 영조(제21대, 1694~1776)이다.
요즘과 비교해 보면 14세 중학생이 국왕으로 살면서 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현대는 청소년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억압하는 사회형태로 변모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대신 평균수명이 늘어난 새로운 세상이긴 하다.
조선시대 왕비의 권한 중 매우 인상적인 것이 ‘섭정권’ 이다. 섭정은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것이다. 왕이 일찍 죽어 왕위를 이은 세자가 너무 어릴 경우 왕비는 수렴청정을 통하여 섭정할 권리가 있었다. 그래서 제7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1418~1483)를 비롯하여 제11대 중종 비 문정왕후, 제13대 명종 비 인순왕후, 제21대 영조 비 정순왕후, 제23대 순조 비순원왕후, 익종(효명세자, 순조의 세자) 비 신정왕후 등이 섭정을 하였다.
또한, 왕이 죽고 나면 세자에게 옥새를 내려주는 사람이 선왕의 왕비였다. 이는 의례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왕이 미처 왕위 계승권자를 결정짓지 못한 상태에서 죽을 경우 왕비는 왕위 계승권자에게 왕위를 부여해주는 실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왕비는 모든 면에서 왕과 동등한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이 내용을 보면, 조선시대 남존여비사상이 있었다고는 하나, 여성이 결국에는 궁궐의 최고 어른으로 정치적 결정까지 하는데 이르는 것을 본다. 후에 이것이 외척의 횡포로 이어지는 폐단이 되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분명 왕비가 왕을 대신하는 것이 여러모로 받아들일 만 하기 때문에 권한이 부여되었을 것이다.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세조 비 정희왕후의 경우,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왕실에서 왕비가
왕으로부터 상하관계로 밀리거나 들러리에 머물지 않고 왕과 대등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여성이 결국 그런 엄중한 궁중생활 환경 속에서도 자질을 드러냈기 때문에 권한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여성)이 자리(수렴청정 제도)를 만든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 27명의 왕이 모두 나름의 업적과 풍파를 겪으며 적게는 9개월(제12대 인종, 재위기간: 1544. 11~1545. 7) 많게는 최장, 51년 8개월(제21대 영조, 재위기간 1724. 8~1776. 3)의 재임을 하며 그 재위 기간마다 조선의 역사를 써갔다. 훌륭한 왕도 많았지만, 필자는 그중에 제15대 광해군(1575~1641)의 생애에 관심이 갔다.
광해군은 왕으로 군림하다가 퇴위 된 후 오랜 기간 유배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1575년 선조(제14대, 1552~1608)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공빈 김씨의 소생이다. 선조는 세자 결정을 계속 미루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비상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1592년 18세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선조가 죽은 후 광해군은 인목대비(선조 비)의 언문 교지에 따라 우여곡절 끝에 34세에 비로소 왕으로 등극하였다.
연산군(제10대, 1476~1506)은 중종반정(1506)으로 퇴출당한 후 두 달 뒤 31세로 생을 마감했지만, 광해군은 인조반정(1623)으로 49세에 폐위된 후, 대궐 밖에서 67세까지 삶을 유지하였다. 연산군은 광적인 폭정과 민심을 배반한 독재자이기 때문에 폐출되었지만, 광해군은 폭정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개인적 원한이 있는 반정세력에 의해 매도되었으며, 정치역학의 희생자라고 말한다.
광해군은 대외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부적으로는 왕권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비운의 왕이 된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조반정의 명분의 첫째가 된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대세를 읽지 못한 것이다. 당시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였고 후금(청)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광해군은 중립외교 노선으로 실리적 외교를 폈지만, 반정 이후 조선은 대명 사대주의 길을 걸어 결국 청과 군신 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을 겪게 된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유배생활 7개월 만에 아내마저 화병으로 죽자,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생활을 이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광해군은 폐위 후 강화도에 위리안치(집울타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 되었다가, 태안으로 갔다, 강화도옆 교동도로 다시 갔다, 1637년 제주 땅으로 옮겨져 유배 생활을 이어나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혹은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을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 발치에 묻어 달라고
하여 유언대로 묻혔다.
이렇게 긴 역사 속의 한 임금으로서 광해를 만나면서 그를 왕보다는 한 사람의 인간, 한사람의 남자로 심리를 추적해 보게 된다. 그의 생애가 많은 좌절과 영광을 겪고 왕위를 박탈당하면서 그 후로도 오래 나머지 인생을 견디고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정상에 올랐다가 추락하여 예상치 않게 사회와 등지고 근근이 살면서 먼 산을 바라보다 어느 날 사라지는 수 많은 쓸쓸한 발자국과 겹친다.
최정상의 자리에 있다가, 타의에 의해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정년까지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40~50대에 느닷없이 명예퇴직을 하게 되고 찬란했던 사회적 지위 대신 소소한 일상에 자족하려 노력하면서 마음을 달래는 중 노년 인구도 점점 많아진다. 이 책에서는 광해군의 유배생활을 묵묵히, 의연하고, 초연하고, 관조하는 태도로 표현했다.
반전할 길이 없는 노년기 여행자의 발걸음에는 회한이 서린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16년의 세자 시절을 거쳐 15년을 왕이었다가, 18년을 유배지에서 그냥 ‘영감’으로 불리기도 했던 왕. 혹시라도 일말 왕위로의 복귀의 희망을 품은 채 마음을 가다듬기도 했을 광해군의 제주에서의 말년을 생각해 본다.
제주는 그때도 지금도 끔찍하게 아름다웠을 터이다.
신순영
조이시애틀뉴스 서울통신원
고려대 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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