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
칼럼니스트, 수필가
서북미문인협회 회원
나는 운 좋게도 나 혼자만의 왕국을 가지고 있다. 그 왕국은 우리 집 이층에 위치한 내 방인 것이다. 이 자그마한 방을 굳이 왕국이라고 이름을 붙인 까닭은 이 방이 화려하거나 특별한 권위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 방은 비록 보잘것 없지만 내가 마음대로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언제든지 편히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내게는 이 방이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이렇게 <왕국>이라고 이름을 붙혀본 것이다.
방 한쪽에는 침대가 있고, 그 옆에는 고풍스러운 옷장과 허름한 책장이 있으며, 창가에는 자그마한 책상과 책꽂이가 있다. 벽에는 손바닥 크기의 십자가와 미켈란제로의 피에타상(像), 그리고 조각 그림이 걸려있다. 이것이 내 소유의 전부인 것이다.
벽에 걸린 감란나무의 십자가는 큰 아들 웅(雄)이가 1993년 이스라엘에 출장갔던 길에 성지에서 사가지고 온 귀한 소장품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안고 슬픔에 잠긴 마리아를 조각한 피에타상도 역시 웅이가 1984년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조각 그림은 내가 1993년에 독일에 체류할 당시 프랑크프푸르트 인근의 어느 시골 장터에서 산 것인데 내가 좋아하는 자연 풍경을 정교하게 조각한 액자라서 특별한 애착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옷장 위의 화장대에는 아내가 지난 2011년 1월 9일에 내 곁을 영원히 떠나면서 두고 간 손가방과 사진 액자, 그리고 간장병이 놓여 있다. 그 손가방 안에는 아내가 쓰던 휴대용 화장품과 의약품들, 그리고 아내의 여권과 여러가지 카드가 그대로 고스란히 덤겨져 있다.
사진 액자는 2006년의 연말에 문인협회 주최로 열린 송년 모임에서 함께 노래 부르던 우리 내외의 사진이다. 간장병에 담겨진 간장은 아내가 손수 메주를 쒀서 만든 간장이기에 나는 이 간장을 날마다 아침 저녁 맛보면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내 책장에는 금색으로 번쩍이는 전집이나 묵직한 장서는 없고 오직 손때 묻은 책들과 참고 자료, 그 밖에 내가 저술한 책과 논설집, 그리고 내가 꾸준히 쓴 일기장이 꽂혀있다. 책장 속의 이들 문헌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이 다섯 가지의 저서와 일기장이다.
내가 펴낸 첫 저서는 1979년에 발간한 <한국 농촌지도사업 발전과정>이다. 이 책자에는 농촌 지도사업에 관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담겨졌다고 해서 그해 연말에 당시의 국무총리 신현학으로부터 녹조근정훈장(綠條勤政勳章)을 받았다. 나는 바로 이 책자를 요약해서 영문으로 변역해 라는 재목의 책자를 만들어 로마에 있는 FAO에 재출헤 당시에는 거금인 3,000 달라나 되는 상금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88년에 정년퇴임을 앞두고 <10대들의 탈출기>라는 책을, 1989년에는 <파키스탄 정부의 자문관으로 일하다가 임기를 마치면서> 라는 보고서를 출간했다. 그리고 1997년에 내 나이가 70이 되자 나는 북녘땅의 가족을 생전에 다시 만날 가망이 없다는 절망감에서 이제까지 살아온 나의 행적을 미리 남기고자 <38선을 넘어 이렇게 살았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던 것이다.
이밖에 내가 소중히 여기는 또 하나의 기록물이 일기장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일기 쓰기를 좋아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일기장은 보물처럼 가지고 다녔다. 일기장은 기억에서 사라진 지나간 일들을 언제든지 다시 알려주는 나의 역사다. 나는 현재 컬럼을 쓰는 과정에서도 일기장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
이러한 내 왕국이 내게 있어서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성역이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나만의 영토이며, 나를 편안하게 잠재워 주는 나만의 안식처이고, 부족한 내 학문을 깨우쳐 주는 나만의 스승이며, 사랑과 평화만이 감도는 나만의 천국이고, 행복에 겨워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나만의 교회인 것이다.
나는 이 왕국에서 현재 아들 며느리의 따뜻한 효도를 받으면서 살고 있으니 진정 분에 넘치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게는 불만이나 미움은 있을 수 없고 오직 감사 뿐이다. 더욱이 나는 오랜 공직생활을 오직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했기에 이제까지 <부자(富者)의 행복>은 맛보지 못하고 <빈자(貧者)의 행복>만 느끼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은 부유하게 사는 사람보다 오히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아기자기한 참맛을 느낀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이리하여 나는 현재도 이 왕국에서 <가난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으니 내 노후생활도 계속 활기를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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