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이 되면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우들의 생각이 어찌 안 나겠어. 특히 금화전투 도하작전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수많은 아군이 부상을 입고 핏물로 변해버린 북한강하류로 떠내려가며 ‘사람 살려’라는 외침을 듣고도 격렬한 전투를 하느라 구조의 손길도 뻗치지 못하고 저승으로 보낸 전우들을 생각하면 죄인이 된 심정이야.”
박영환(81) 할아버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한지 62년이란 세월이 말해주듯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비던 혈기왕성한 군인의 머리에는 서리(?)가 내리고,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파였지만 참혹한 전쟁의 기억력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혈혈단신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은 박 할아버지는 6.25가 발발하자 자원입대, 5년의 군 생활을 마쳤다. 그의 꿈은 남북통일이 되어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원대함에서 시간이 흐르며 실낱같은 희망마저 포기한지 이미 오래다.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6.25는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한다. 전쟁당시 자행되었던 수많은 학살은 아직도 그 실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포격에서 보듯 군사충돌은 계속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남과 북은 정전협정과 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을 종료한 것이 아닌 휴전상태다. 휴전이란 곧 휴식이 끝나고 언제든지 전쟁상태로 돌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김일성 공산집단의 불법 남침으로 촉발된 6.25 전쟁은 30만 여명의 아군과 130여만 명의 공산군 측 인명피해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동족상잔의 서곡이었다.
1천만 명의 이산가족, 전쟁고아에 국토의 80%이상이 파괴된 참극이었다. 흔적 없이 사라져간 생명들이 허다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위험 속에서 살아남아 역사가 된 노병(老兵)을 지난 16일 타코마 다운타운에 위치한 노인아파트에서 만났다. 박 할아버지는 “6.25 참전용사들은 삼망(三忘)을 실천했다. 첫째 명령을 받고서는 집을 잊고, 둘째 싸움터에 나가서는 부모를 잊고, 셋째 공격의 외침을 듣고서는 자신을 잊었다”며 목에 실핏줄을 세워가며 음성을 높였다.
◆독립유공자 후손에서 반동분자의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면사무소 급사로 사춘기를 보내던 어느 날 북한군 입대 영장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박영환 할아버지 가족은 김일성 공산집단의 출현으로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하루아침에 반동분자의 후손이란 빨간 글씨(?)로 변했다.
박 할아버지의 어머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박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일찍 여위어 어려서부터 가장의 무거운 짐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살았다. 면사무소 급사를 시작으로 막노동이며 닥치는 대로 어떤 일이든 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움직여야만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 수가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크나큰 결단을 내렸다.
그는 “어느 날 어머니가 부르더니 내 손을 꼭 잡고 펑펑 울며 ‘평생 반동분자 후손이란 소리 듣지 말고 남쪽으로 내려가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라’는 말이 아직도 귓전을 때린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1949년 6월 칠흑 같은 야밤에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지만 그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을 이불삼아 잠을 청하기도 지쳐 숙식을 제공한다는 소리에 강원도로 달려가 오징어잡이를 하다 6.25 전쟁 발발 소식을 접했다. 피는 못 속인다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원입대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전우들의 절규
수적으로 절대 열세인 아군은 군의 기본교육도 없이 신병들을 전선으로 배치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루가 지나면 하나 둘씩 줄어드는 전우들을 보며 눈에는 핏발이 섰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어디였냐는 질문에 박영환 할아버지는 “금화지구전투와 인제군 기린면 현리전투”라는 즉답이 돌아왔다.
이어 “전쟁의 참혹함은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지. 숨이 넘어가며 ‘살려 달라’는 절규에도 손을 쓸 틈도 없이 저승으로 떠나보낸 전우들이 얼마나 원망을 하겠어. 북한군의 잔인성은 상상을 초월하다 못해 끔찍해. 현리전투에서는 부상병 호송 중인 앰뷸런스 행렬에 불을 지르는 잔인무도함을 내 두 눈으로 봤으니까.” 박 할아버지는 3년의 전쟁을 치루며 자신은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것이 다행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큰 짐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런 이유로 6월이 되면 가슴이 아려오며 죄책감이 아닌 죄책감에 밤잠을 설치기도 일수다.
◆독립유공자후손, 6.25참전유공자 연금 장학금 쾌척하는 ‘기부천사’
박영환 할아버지의 장학금 쾌척은 올해로 11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매년 한국의 보성여자고등학교에 전달하는 장학금은 5000달러로 알려졌다. 장학금의 명칭은 그의 할아버지 이름을 딴 ‘박승호장학금’이다. 분명한 사실은 정부보조로 사는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3.1운동을 하다 순직한 그의 할아버지 고 박승호 열사의 후손 자격으로 받는 연금과 박 할아버지의 6.25참전유공자 연금을 모아 매년 전달한다. 흔한 말로 고물자동차도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한푼 두푼 모아 선행을 베푸는 할아버지의 미담이 혹독한 불경기로 찌든 미간의 주름살을 피게 만든다.
보성여자고등학교 지정 이유는 박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보성여고 출신이며, 끼니조차 때우기 힘든 상황에도 아들인 박 할아버지를 자유를 만끽하며 살라고 등을 떠밀다 시피 남쪽으로 보낸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할아버지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이 앞서가고 있다.
박영환 할아버지는 “독립유공자후손 연금도 6.25참전용사연금도 내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중단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중단해야만 하는 학생들을 생각하면 나의 자화상을 돌아보는 것 같다”며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학업을 포기했던 절박한 심정을 에둘러 표현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독립유공자 표창장 및 6.25참전용사증서
박영환 할아버지의 아파트 거실에 들어서면 6개의 표창장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세월의 변화 속에 누렇게 변색됐지만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왔다. 전?현직 대통령의 표창장이 여느 단체장들이 받는 표창장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 전쟁터에서 전우와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을 자신 있게 걸어 놓고 있는 모습에서 박영환 할아버지 가문의 애국심을 알기에 충분했다.
아직도 자신의 군번줄을 목에 걸고 다니며 철모와 탄창집, M-1 실탄을 거실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박 할아버지는 “자기 부모도 모르는 게 공산주의자들”이라며 “탈북자들이 숫자가 늘어만 가는 이유는 사상보다는 배고픔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몸은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동포들이 안보의식을 강화해 한반도에 평화의 안식처가 정착되도록 많은 관심을 갖자”고 당부했다. /미디어한국 김성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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