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골목에 목련꽃이 만개하던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노량진역에서 열차를 타고 가다가, 신도림에서 녹색 2호선 열차로 갈아타고 달리어 합정역에서 내렸다.
그길로 한강 쪽에 있는 서울외국인묘지공원을 찾아갔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니, 보도 양쪽에 목련꽃이 하얗게 피었다. 오름길 왼편에 우뚝 서 있는 교회도 반기는 것 같았다. 노란 개나리꽃을 완상하며 언덕에 올라섰다.
외국풍의 비두(碑頭)를 지닌 비석들이 아래쪽에 늘어섰다. 비석들 뒤에는 무덤들이 잔디를 이불 삼아 덮고 누웠는데 따듯해 보였다. 조선 시대에 양화진 (楊花津)을 수비하던 진영이 있던 곳이다.
묘역 가운데 입구로 들어섰다. 바른쪽 나무 옆에 어니스트 토마스 베텔(Ernest Thomas Bethell)의 갓비석이 서 있었다. 비두가 팔작지붕 모양을 하고 있다. 비신에는 ‘大韓每日申報社長大英國人裵設之墓’라는 열여섯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운동을 대변하였다.
조금 들어가자, 왼편에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묘비가 보였다. 비신 윗면에는 영어로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뜻인즉슨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이다.
호머 헐버트는 미국 감리회 선교부의 선교사였다.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과 문화 소개에 큰 공을 세웠다.『한국의 역사(The History of Korea)』와『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라는 책도 지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바른편에 헨리 벤크래프트 졸리(Henry Bencraft Joly)의 묘비가 눈에 띄었다. 비신 위에 삼각형 모양의 비두가 있고 그 위에 기둥 모양의 탑이 있다. 비신에는 영어로 글이 씌어 있는데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헨리 벤크래프트 졸리는 영국 영사였다. 곁에 묻혀 있는 클라라 에인스 릴리 졸리(Clara Agnes Lillie Joly) 부인은 순종 임금이 세자였을 때에 영어 교사로 봉직하였다.
아래로 내려가니, 홀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부부의 묘비가 있었다. 비신 윗면이 맞배지붕처럼 생겼다. 비의 제목은 ‘大美國人元杜尤牧師夫人好敦氏之墓’라고 되어 있다. 홀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장로회 최초의 새문안교회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한영사전도 편찬하였다.
주위를 살펴보자 어린이 묘비들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묘비에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름이 없는 ‘Unmarked’라는 묘비들도 있었다. 이런 무덤의 주인공은 어떠한 말을 남기고 싶었을까.
기록에 보면 이곳에는 모두 429기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신원 미상의 무덤은37기나 된다는 것이다. 국적별로 보면 미국인의 무덤이 266기이고 영국인의 무덤이 35기이며, 직업별로 보면 선교사 및 가족의 무덤이 206 기요 군인들의 무덤이 64기라고 한다.
묘역 아래쪽에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옛 양화진의 동쪽 언덕에는 절두산(切頭山)이 고개를 불쑥 내밀고 있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시절에 천주교 신도들이 처형되었던 곳이다.
묘지공원을 한 바퀴 돌아서 묘역 가운데 입구로 돌아왔다. 저만큼 나무들 사이에 석양이 걸렸다. 묘지 전경을 내려다보니 저 아래서 목련꽃들이 손짖을 하는 것만 같았다.
무덤의 주인공들은 어찌하여 낯설은 이곳에 묻히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여 보았다. 여기에 잠든 영혼들은 이 나라를 사랑한 나머지 이 땅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을 것이다.
묘지공원의 무덤을 보노라니, 한말 외교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 같다. 또 무덤의 주인공들이 풍전등화의 코리아를 구해 보려고 애쓴 일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경구
수필가. 1998년 <한국수필> 등단
작품집: 소렌토 아리랑, 시애틀의 낮달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
현재 위싱턴주 뷰리엔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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