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시애틀의 ‛연어의 고향’ 마을에 2020년 경자년(庚子年) 새해가 밝았다. 내가 86번째 아내는 84번째 새해를 맞는다. 아침을 먹고 이층 서재로 올라와 인터넷을 열었더니, 서울에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소식과 앙드레 류의 ‛석별의 정-유튜브’를 보내서 온종일 즐겼다.
날씨가 따듯한 봄이 되자, 나는 고 이영수 (李永壽) 동포가 쓴 『내가 살아온 평생의 길』이라는 귀한 회고록을 읽었다. 나보다 연세가 15살 연상인 저자는 회고록을 쓴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나이 96세를 넘도록 자랑될 만한 공적 없이 헛되게 보내온 것을 후회한다. 다만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미움받지 않도록 노력해 왔을 뿐이다.”
저자의 경력을 보니, 이영수 동포는 1918년 7월 21일에 강원도 원주군 문막면 건등리 469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자손이다. 1939년 3월 2일에 강원도 춘천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4월에 고향인 원주군농회에 지원해서 농회 기수로 임명되었는데, 월 초봉이 32원이었다.
저자는 1957년부터 강원도 농촌진흥원에 근무하다가 삼척군 농촌지도소 소장을 위시하여 여러 지역의 농촌지도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1979년 12월 10월에 나이 60세로 37년간의 공직을 정년퇴직하였다. 1979년에 통일벼 기술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농촌진흥청 청장에게서 표창장을 받았다.
저자는 1941년 1월 16일 춘천중앙감리교회에서 임진국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회고록 21쪽에는 큰 글씨로 “나의 平生에 追憶의 日記”라는 글이 쓰여 있다. 글씨 아래에는 저서, 안경, 회중시계 사진이 실려 있다. 필자는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다고 하였다. 회고록 내용이 값지고 스릴이 넘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다. “미일 국제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한국 고교생들에게 군사훈련이 국책으로 제정되어 춘천 농고에도 현역 육군 소좌(육군 소령)와 예비역 소위가 파견되었다. 한 주일마다 전쟁을 위한 집총훈련을 하였는데 몹시 고통스러웠다. 특히 겨울철에 맨손으로 하는 훈련은 견디기 어려웠다.”
필자는 회고록 61쪽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때 한국인들이 받은 압박과 설음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한국은 완전 전시 체제로 변했다. 징병 제도는 물론 노무자 징용, 군수 물자 조달, 심지어는 위안부까지 차출 강요당하고 말았다. 일반 가정의 금속 제품인 식기류, 세숫대야, 놋수저 따위는 물론 몸에 걸치는 금속 장식품까지 모조리 공출, 군수품 공장으로 징발해 갔다. 감추어 둔 물건도 교묘히 찾아내거나, 총 칼로 겁을 주어 모두 빼앗아 갔다.”
회고록 76쪽에도 일제의 만행이 자세히 쓰여 있다. “미일 전쟁으로 모든 사정이 점차 악화됨에 따라, 지원병 제도가 의무 징병제로 바뀌어 30~40세 이상은 무조건 노무자 징용 대상자가 되어 군수 공장과 탄광 노무자로 나가고 미혼 여성은 일선 위안부로 강제 징집하였다. 농산물 공출, 금속품 수집, 심지어는 소나무의 진액까지 채취하여 공출하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관리를 경험한, 일본 관리의 탄압과 행패를 일기장에 기록한, 또 팔일오 광복 후에 공직을 수행한 인사를 내가 만난 게 이 번이 두 번째이다. 환언하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저자의 회고록이 사건의 현장을 목격한 귀중한 기록이요 역사적 사실이다. 회고록은 내가 고향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와 내가 목격한 사건의 현장하고 똑같다.
다른 하나는 다음과 같다. 2019년 12월 11일 내가 한국 텔레비전을 보았더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강제 연행과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제1417차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옆에서는 어떤 중년 지식인 남성이 ‛역사 왜곡’이라는 글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었다. 일제 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강제 연행은 없었다는 뜻이다.
회고록은 다시 계속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쯤에 저자가 라디오를 틀어 보니, 북한 괴뢰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중이라는 뉴스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춘천 시내에 포탄이 비 오듯 퍼붓는 와중에 아홉 살배기 영일이가 인파에 떠밀려서 어디론가 사라져 전쟁 고아가 되었다. 장남을 찾아 헤맨 지 3년 만에, 부산에 있는 애린원에서 미국인 모 인사와 입양이 합의되어 도미 수속 중에 있는 영일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왔다.
그 후 1988년 6월 14일, 저자 내외는 여객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였다. 미국에 이민 온 것이다. 처남 집에 이틀 머물렀다가 둘째 딸네 집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딸은 루이지애나주 레이크 찰스에서 살고 있다. 사위는 자동차 수리공이고 딸은 중국 요릿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한다. 사위 내외가 직장에 나가면 뒤뜰 잔디밭을 밭으로 만들고 고추 농사를 지었다.
2005년 4월에 저자 내외는 워싱턴주 페데럴웨이로 이사왔다. 2006년 정월 어느 날, 아내의 식사가 식도를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서 1월 28일 복부를 절개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병세가 날로 악화하였다. 저자는 아내의 배꼽 주변을 알코올로 소독하고, 배꼽에 고정된 관을 통하여 영양제를 공급하였다. 노인 요양원으로 아내를 보내면 좋겠다는 주치의 권고를 사양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저자는 아파트에서 쌀을 곱게 갈아 왼쪽으로 50번, 오른쪽으로 50번을 숟갈로 저으며 죽을 쑤어 아내의 입 대신에 복부에 연결된 관을 통하여 아내에게 먹였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지극한 병간호에 아랑곳없이 2008년 2월 16일 소천하였다. 달마다 1일과 16일에 마운틴 뷰 공원묘지로 아내 무덤을 찾았다. 아, 거룩한 인고의 세월이여!
2011년 1월 9일 저자는 금란감리교회에서 명예 장로 직분을 받았다. “여보! 나 교회 다녀왔어요!”라고 말하면, 손을 들어 화답하던 아내 모습이 떠올랐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날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평생의 추억들을 202쪽 분량의 글로 써서 2014년 5월에 발간하여 네 자녀와 친구들에게 나눠 주었다.
저자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아파트에서 혼자 살다가 2019년에 별세하였다. 저자가 자녀들 앞으로 남긴 마지막 당부의 말은 이렇다. “노인 상조회에 사망 증명서를 첨부하여 상조 회비를 청구하기 바란다. 그러면 공제금을 제한 상조 회비 1만 불 정도를 보낼 것이니, 장례 비용에 충당하기 바란다.”
초가을 들어 지인에게 빌린 회고록을 읽고 나니, 나는 그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영수 선배가 일제의 식민 통치에 관하여 회고록에 쓴 기록은 역사적인 자료가 됨을 새삼스레 느낀다.
이경구
수필가. 1998년 <한국수필> 등단
작품집: 소렌토 아리랑, 시애틀의 낮달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
현재 위싱턴주 뷰리엔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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