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일을 까맣게 잊은 줄 알았는데, 오늘 불현듯 떠오른다. 그땐 너무 가혹한 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쩔쩔 맺는데. 이젠 추억이란 이름으로 가슴을 똑똑 두드린다. 그이는 같이 이민 왔다 회사가 있는 서울로 곧바로 돌아가야만 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원조기러기가족이 되고 말았다. 일년에 한두어 번 볼까말까 하는 생활은 지루하도록 이어졌다.
아무때나 왔다 가고 싶을 때 가는 바람의 남자. 그가 다녀가면서 그냥 시장이나 다녀오라는 듯 극히 가볍게 “나, 간 다음에 집 페인트나 하지” 하고 가버렸다. 집 페인트라, 참으로 생소하다. 무슨 색을 칠해야 좋을지? 너무 난감한 일이지 싶다.
그런데도 그때 ‘왜, 나, 못해요’ 소리 한 마디 못했을까? 아마 그건 이곳의 어려운 일은 모두 내가 도맡아 해야 한다는 묵언으로 약속한 고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미국생활 십년 차. 연년생 사내아이 셋을 데리고 네 곳의 비즈니스와 부동산 관리까지 일인오역을 해내는 나를 지인들은 툭하면 수퍼우먼이라 한다.
그들 눈엔 뭐던지 척척 잘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은 혼자 맨땅에 헤딩하며 새 땅을 개척하느라 가슴으로 흘린 눈물은 얼마큼이었던가? 사실 그러한 소리는 천근의 무게로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다.
페인트 회사 세 곳에 견적을 봤다. 그런데 한결같이 이 집은 큰 고급 주택이라면서 여느 집 딱 두 배를 부른다. 순간 내 고객중에 페인트 대리점 매니저가 언제든지 페인트가 필요하면 도매로 주겠다던 생각이 났다.
그에게 전화하니 인건비만 받고 일할 전문가를 소개해주겠단다. 정말 색깔을 잘못 정하면 낭패라는 생각에 고민에 빠졌다. 그 후 그 바쁜 매니저가 친절하게 두 번이나 페인트 공을 데리고 집에 찾아와 이런 현대식 고급 주택엔 이러이러한 페인트를 써야 한다고 설명해줬다.
그리고 특히나 서북미지역은 비가 잦아서 페인트 선택을 잘해야 한다고도 일러줬다. 정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만 집에 오는 길에 차 사고가 크게 나고 말았다. 정신이 깜박깜박 하는데 경찰이 ‘튼튼한 네 차가 이지경이 되었으니 너는 필시 많이 다쳤을 것’이라고 한다. 차를 폐차시켰다.
결국 열흘동안 일도 못나가는 와중에 페인트 작업 날짜가 닥쳤다. 할 수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몇차레나 페인트를 사 날랐다. 막상 삼층 집이라 페인트가 다른 집보다 배나 들었다. 그리곤 혼자 오래도록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치료를 받으러 다녔던 일도 이젠 희미한 옛 추억이 되었다.
살다 보면 금상첨화라던가, 설상가상, 또는 호사다마를 만나기도 한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이 세상 누군들 설상가상을 선택할까. 내 사고가 신호탄이나 된 듯, 이번엔 아이들이 경쟁이나 하듯 같은 주에 차레차레 자동차 문제를 일으켰다.
옛말에 “물건 볼 줄 모르면 비싼 값을 치르라고” 하듯이, 차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좀더 지불하고 튼튼한 차를 선택했다. 혹시 그러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마음에 남들 눈총 받아가며 좋은 차를 사줬다. 그런데 그만 사주자마자 연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다니.
먼저 큰 아이가 평소와 달리 말없이 친구랑 캐나다에 다녀오다가 자동차가 크게 고장이 났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다. 아이는 그곳 딜러에 차를 세워놓고 기숙사로 피신하고 말았다.
다음날은 둘째 아이가 새 차를 타고 나갔다 상대방 실수로 사고를 당했다. 자동차를 딜러에 보내고 보험회사에 쫓아갔다. 그 보험 회사엔 동양사람을 심하게 차별하는 직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이겠지만 그 사람과 맞닥트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자세히 듣지도 않고 무조건 쌍방 잘못이라고 우겨서 대판 싸웠다.
담당 경찰관이 상대방에게 티켓 두 장을 줬다고 내게 전화로 알려줬는데. 나는 뿔이 나서 “당신, 어디 맘대로 되나 보자”하고 큰 소리를 치고 나왔다. 그런 얼마 후 기록을 떼어보니 정말 쌍방 잘못으로 되어 있어서 정정했다.
나중에 들으니 사고에 관계된 차 두 대가 같은 보험 소속이라 쌍방 잘못으로 처리하면 양쪽에 보험금을 올려 회사에 이익이 있어서란다. 그런데 평소 영어회화 실력이 딸리면서도 이상하게도 싸우거나 따질 땐 나도 모르게 또박또박 말이 잘도 쏟아져 나온다. 아마 혼자 감당해야 하는 여자의 힘이 아닌가 싶다.
겉 모습(한국인)이 그가 설정한 편협한 인종차별의 그물에 걸려들다니. 맙소사!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지 않아도 때로 같은 민족이 낯뜨거운 일을 저지르면 아예 국적을 숨기는 사람도 본다.
그러나 나는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이방인의 삶을 살면서 어느 한 순간도 국적을 숨긴 일이 없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난 특히 자랑스러운 대한의 딸로서 한국인의 본이 되고자 나의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말았다.
이제 차 네 대중에서 커다란 트럭 한 대만 남았다. 때로 그 트럭을 운전하고 나가면 친구들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아니, 미시즈 박이 이 큰 차를 몰아요?” 하던 차다.
어느날 그 트럭을 몰고 일 마치고 오로라 다리를 막 건너오는데, 웬일인지 차가 한쪽으로 기우뚱하고 쏠리는 순간 타이어가 펑크난걸 알아챘다. 옆 차가 먼저 봤는지 서행을 하며 길을 양보한다. 간신히 차를 몰아 어느 집 앞에 세우고 메모지를 꽂아놓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어쩌라고 꼬리를 물고 연속적으로 문제가 생기는지? 어찌 되었든 아이들에게 전화하려니 그 흔한 동전하나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는 건 동전뿐 아니라 지폐 또한 없지 않은가. 사정 이야기를 하니 중국식당에선 귀찮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짧게 쓰라고 한다. 마침 아이들 친구가 와 있단다. 기다리며 곰곰이 생각하니 비상금 넣어 둔 것이 떠오른다.
내가 처한 현실이 참으로 기막히다. 어쩌면 한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고 또 일어나다니. 인생이란 오미자 맛인가?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참으로 서글픈 생각이 들며 누군가가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것 같아 마음이 시려온다.
그때 난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갔던가? 이제와 돌이켜보니 내 인생은 연금술사의 손안에서 끝없이 단련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그로써 내게 찾아온 모든 사건들을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게 되었다.
신은 감당할만한 시련만 주신 다지? 사실 젊은 날 내가 겪은 시련들은 말이 그렇지 참으로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다름아니리라. 그러나 인내의 열매는 달디 단 풍성한 삶이 되었지 싶다.
오늘도 알찬 하루를 보내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의 깊은 뜻을 가슴에 아로새긴다.
(하인리히 하이네 문학상 수상작품)
박유선
수필가, 월간 <수필 문학> 등단
미주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부분) 당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 수필집 '길 없는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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