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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10/02  조이시애틀뉴스
[김수영 이야기] 약속

30여 년 전, 5월 8일 어머니날 무렵이었다.

부모님과 여동생 가족, 조카와 함께 오션쇼어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호텔도 오래전에 예약해 두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오후 2시, 오랜 고객과 약속이 있어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가던 중이었다.

벨뷰칼리지 앞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오른쪽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차가 내 차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쾅!” 상대 차량은 튕겨 나갔고, 내 차는 바퀴를 덮을 정도로 심하게 찌그러졌다. 놀랐지만 차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상대방을 살폈다. 차 안에는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명함을 건네주었다. “증인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곧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경찰은 사고가 심하니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두 시에 고객과 약속했는데….’

나는 경찰에게 말했다. “2시에 고객과 약속이 있습니다. 먼저 약속 장소에 다녀와야 합니다.”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20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전화로 사고가 났다고만 하면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는 망가진 차를 몰고 약속 장소까지 갔다.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찌그러진 내 차가 가장 확실한 증인이었으니까. 고객에게 사고 상황을 보여드리고 다시 약속을 잡은 뒤, 보험회사에 연락하고 차를 딜러에게 맡겼다.

그리고 큰 차를 렌트했다. 다음 약속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함께 가기로 한 오션쇼어 여행이었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부모님께는 그저 여러 명이 타야 해서 큰 차를 빌렸다고만 말씀드렸다.

하지만 오션쇼어로 가는 동안 몸이 붓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사고의 충격이 뒤늦게 찾아온 것이다. 함께 간 가족들은 내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도, 열이 나고 몸이 부어오르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해변을 즐기고, 준비해 간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나는 어느 하나의 약속도 어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동안 내 몸은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아팠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들을 가끔 들여다본다.

사진 속에는 즐거운 가족여행의 모습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내 기억 속 그 여행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아픔의 시간으로 남아 있다.

당시 나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나는 조금 쉴 테니, 모두 바닷가에 가서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진통제를 먹고 누워 있으니 오래전 일이 하나 떠올랐다.

1970년대 이민 초기, 아버지를 모시고 가다 대형 트럭과 충돌해 우리 차가 두 번이나 굴렀던 사고였다. 그때 아버지는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어머니에게 들었다. “그때 아버지가 너무 아파서 오랫동안 누워 계셨단다.”

그제야 알았다. 아버지도 몹시 아프셨지만, 딸이 걱정할까 봐 아픔을 참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큰 사고를 당하고도 고객과 부모님과의 약속을 먼저 생각했던 나.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작은 약속도 큰 약속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약속은 어기고 싶지 않았다.



김수영 
힐릭스부동산 대표
전 평통 시애틀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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