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교수님, 유난히 무덥던 지난 여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30년 가까이 산 제2의 고향인 이 도시에서 그렇듯 지독한 더위는 처음입니다. 엊그제같이 새싹이 돋더니 혼자 보기 아까운 싱그러운 꽃들을 피웠다 어느새 스러져간 걸 보면 세월을 막아낼 재간은 아무에게도 없지 싶습니다.
어느새 분단장했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조락의 계절입니다. 어떻게 그 긴 여름을 정말 홀로 고독하게 보내고 말았는지 싶습니다. 혼자 속을 비우며 또다시 말개지도록 헹구어내며 생각합니다.
우리 집 아름다운 꽃동산을 한번 보고 싶으시다던 교수님을 지난 여름에 한번 모신다던 것이 빈말이 된 듯싶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직도 낯가림이 심해 두문불출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왜 그렇게 사람 만나는 것이 싫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보라는 소리로 들려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지만 순수한 사람일수록 어떤 비리나 부정한 문제에 부딪치면 더 깊이 상처를 받는다지요. 그러다 보니 그 후유증이 그만 대인기피증이라는 기괴할뿐더러 치료할 길조차 없는 병에 걸리고 말았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둔한 저로서는 처음 얼마간은 왜 제가 사람을 대하기가 싫은지를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모임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한두 번 빠졌지요. 그러다 반복되는 심리상태에 저도 짜증이 나며 좀 과하게 오래간다 싶을 때에서야 비로소 반갑지 않은 대인기피증이라는 마음의 병에 걸린걸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이유를 알았기에 그 상황을 어떻게 하던지 벗어나 보려고 사실 노력하고 있는데, 그게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제 생애에 있어서 진정 그런 시간을 원치는 않았다 해도, 어쩌다 보니 절대 인간적 고뇌와 동거동락을 하게 되었지요. 아니, 어쩌면 어떤 면에선 일정기간 바라던 바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 막상 마주하고 보니 그게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새겨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래도 인간은 고독과 고뇌를 떠나선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적 고뇌로 인한 고독은 결국 신앙과 이성의 경계에서까지도 몹시 망설이게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깊은 사유 즉 사려 깊은 통찰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고통 또한 따를 수밖에 없지요. 바라건대 오늘의 시련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새로운 삶을 창조하여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해보며 또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결국 제가 이루기를 바라며 그렇게 살아야만 된다고 굳게 믿는 정의로운 길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비리와 압제로부터 옹호해 나가며 순수한 문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켜나갈 힘을 오롯이 키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인간이 인간다운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때로 혼탁한 사회로부터 어느 만큼의 거리를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하루는 “얘들아!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하셨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호랑이요, 도깨비요, 간첩이요, 강도요”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하 하 하 하고 웃으시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너희들이 열거한게 아니라 ‘보통사람’이란다” 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왜 사람이 가장 무서운가를 설명해 주시던 선생님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사람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또 있을까요. 인간의 그 생각이라는 것이 좋은 세상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세상을 아주 망가트리기도 하는 것을 날마다 보고 있으니까요. 결국 아무리 명석한 두뇌라 하드라도 어느쪽으로 쓰느냐가 관건이겠지요.
악한 지능이 발달한 사람은 백해무익할 뿐더러, 머리가 별로 명석하지는 않더라도 차라리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제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도 못한 게 아닐까요.
대인기피증, 제까짓 게 뭐라고 함부로 남의 가슴속 깊은 골방에 자리를 턱 잡고 들어 앉았을까.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부정할 길 없이 인간은 너나없이 사회적 동물이니 하루빨리 그 괴물을 쫓아 내 자유롭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겠지요. 생텍쥐베리의 “도망쳐서는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실감나는 날들입니다.
교수님, 변명이 너무 구차한가요? 그러나 교수님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아직 우리가 같이할 시간은 따로 남아 있으리라 믿으니까요. 내년에도 그 싱그럽고 아름다운 꽃이 또 다시 피어나겠지요? 그때 만나 미안함을 풀고 싶습니다.
마음은 분명 내 마음이건만, 고만한 것조차 내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내가 때로 싫어집니다. 그저 세월이 약이려니 해야겠지요.
박유선
수필가, 월간 <수필 문학> 등단
미주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부분) 당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 수필집 '길 없는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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