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가 고국을 방문했을 때는 가을이었다. 고향 사람들이 논에 누렇게 익은 벼를 수확하며 가을걷이 하느라 한창 바쁠 때였다.
넝쿨이 다 말라버린 커다란 늙은 호박들이 닭장 지붕이며 바닥에 여기 저기 여러 덩이 누워있었다. 영상 8도 이하면 냉해를 입는다는 생각이 나서 우선 보일러실로 옮기기로 하였다. 호박을 따고 손으로 들어 올리는데 여간 무겁지 않았다. 아내와 같이 둘이 간신히 들어 옮겼는데 족히 20kg은 될 듯싶었다.
10남매 중 유일하게 농사를 짓는 동생은 신품종 마디호박이나 마디오이 같은 개량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개량종은 엄청 많이 열매가 열리지만 맛이 토종 재래종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이다. 이 늙은 호박도 재래종 토종 조선호박이다. 호박을 보니 어린 시절 호박에 얽힌 생각이 문득 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운동화는 비싸서 못 사신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울타리 밑에 심은 조선호박은 울타리를 타고 올라갔다. 울타리에는 황금색 호박꽃이 만발하였다.
커다란 호박벌들이 꽃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꿀을 채취하였다. 까맣고 통통한 호박벌은 보기에 귀여웠다. 발에 노란 꽃가루를 묻혀 가면서 웅! 웅! 소리를 내며 열심히 일을 하였다. 우리들은 호박벌이 들어간 꽃을 손으로 잽싸게 오므리고 꽃을 땄다.
고무신을 벗어 그 속에 넣고 얼른 원을 그려가면서 돌렸다. 그러면 벌이 어지러워 빈사상태에 빠진다. 얼른 벌을 꺼내어 꽁지에 있는 독침을 제거하고 내장 속의 꿀을 빼먹었다. 물방울 같은 흰 꿀 한 방울을 입에 넣으면 얼마나 단지 그 단맛에 취해 버렸다.
철없는 우리는 벌을 죽여 가면서 꿀을 빼 먹는 게 좀 잔인했지만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암호박꽃도 따서 그 짓을 하였다. 그러다가 호박 주인에게 들켜 호박농사 망친다고 꾸지람을 듣고 풍비박산 삼십육계로 도망치곤 했다.
그 후 짓궂은 우리는 반성은 커녕 막 크는 애호박에 작은 나무 말뚝을 쳐 박아 보복하기도 하였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철없는 행동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된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서리가 내린 날은 날씨가 따뜻하다. 보일러실에 보관하여 둔 토종호박 중 제일 크고 잘 익은 호박을 대청으로 운반하였다. 둥근 호박을 보니 시집살이 애환 노래가 떠올랐다.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가 어뗩디까.?/ 예야! 예야! 그 말마라./ 시집살이 개집 살이/ 앞밭에는 고추심고/ 뒤밭에는 당초심어/ 고추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 보다 더 매울쏘냐?/ 말 못해서 삼년이요,/ 눈이 어두워 삼년이요,/ 귀먹어서 삼년이요./ 석삼년을 살고 나니...... 도리도리 도리소반에/ 수저 놓기도 어려우며/ 둥글둥글 호박 심기/ 밥 담기도 어렵더라......."란 구절이 나온다.
커다란 밥사발에 밥을 산 모양으로 수북이 풀 때 쌀이 부족했던 그 시절 특히 보리나 잡곡밥은 끈기가 없어 자꾸 허물어져 힘이 들었다. 반찬이라야 푸성귀 나물과 된장찌개이고 밥으로 양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밥을 사발 높이 보다 더 수북이 담아야 했다. 밥 담는 고초를 둥근 호박에 비유하였다.
호박은 모나지 않고 둥글며, 무던하고 수수하다. 농부 같이 소탈하다. 까다롭지 않고 원만하다. 멋 내지 않고 생긴 그대로를 드러낸다. 황금색 꽃을 보라. 큼직하고 연약한 꽃은 시골 아낙이 장롱 속에 깊이 넣어둔 노란 한복을 꺼내 입고 나들이가는 소탈한 모습 그대로다. 화장도 하지 않고, 흔한 반지와 목걸이 하나 없이 걸어가는 촌부의 상(相)이다.
해가 뜨면 피는 황금색 호박꽃은 저녁때 까지 불과 8시간도 가지 않고 시들어 버린다. 쪼글쪼글하게 늙어 떨어지는 호박꽃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오이는 2년만 같은 장소에 심어도 연작(이어짓기)의 해 때문에 죽어버린다. 호박은 울타리 밑 항상 그 자리에 몇 십 년을 심어도 아무 탈 없이 주렁주렁 잘도 열린다. 오히려 더 많이 열린다.
미스코리아같이 잘 생긴 날씬한 오이는 잎도, 줄기도, 꽃도, 씨도 먹지 못한다. 오이는 오로지 생(生)으로만 먹는다. 오이냉국, 오이소박이, 오이지, 오이깍두기, 목마를 때 깨물어먹는 오이 등 모두 생오이다.
그러나 못 생긴 호박은 미스코리아는 커녕 추녀대회에 나갈 자격 밖에 없다. 이런 호박은 오이와 달리 생으로 먹지 못하고 익혀 먹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횡재했을 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다고 말한다.
애호박은 새우젓 넣어 볶아 먹고, 부침개 부쳐 먹고, 늙은 호박은 늙은 호박대로 죽 쑤어먹고, 호박고지로 떡을 해 먹고, 쪄서 먹으며, 호박잎은 쌈 싸먹고, 된장찌개에 넣어 먹으며, 줄기는 줄기대로 볶아먹고, 꽃은 기름에 튀겨 먹는다.
또 호박씨는 볶아 먹고, 심지어 뿌리까지 달여 차로 먹으니 이렇게 버릴 것 하나도 없는 호박 전체가 집안으로 들어오면 횡재의 행운이 아니겠는가?
누르스름한 잘 익은 호박을 대청으로 운반하여 뉘어 놓았다. 너무 커서 호박 같지가 않았다. 부엌칼을 직각으로 세워 겉껍질을 긁기 시작했다. 호박이 굴러 아내는 붙잡고 나는 박박 긁었다. 미국 단호박은 겉껍질까지 먹는다. 겉껍질을 제거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호박을 반(半)으로 잘랐다. 속이 홍황색으로 빨갛게 잘도 익었다. 보기에도 맛있게 생겼고 하얀색의 씨가 빨간 속살 속에 박혀 환상적이었다. 속을 파내고 죽 쑤어 먹을 부분을 잘라 떼놓고 호박고지를 켰다. 난 붙잡고 아내는 2cm두께로 돌려가면서 켰다.
이렇게 켠 호박고지를 화장지 풀어 놓은 것처럼 길게 사렸다. 1m길이로 잘라 밖의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밤엔 서리를 맞아 얼고 낮엔 햇볕을 쬐며 말렸다. 동태가 밤엔 얼고 낮엔 녹아 황태가 되듯이 밤과 낮의 온도차로 10여일 정도 말리니 맛있는 호박고지가 되었다.
아내가 호박죽을 쑤었다. 붉은 색으로 죽 색깔부터가 달랐다. 당도가 높아 설탕을 넣지 않아도 맛이 달았다. 오랜만에 고향에서 쑨 달달한 호박죽을 먹었다. 하얀 새알심이 졸깃한 게 뷔페에 나오는 호박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맛이었다.
닭장 지붕에 누워있던 늙은 호박으로 쑨 호박죽을 맛있게 먹었다. 두고두고 고향에서 먹었던 그 호박죽의 맛을 나는 영영 잊지 못하고 있다.
이성수 (워싱턴주 페더럴웨이 거주)
충남 예산 출생, 연세대 졸업
서북미 문인협회 회원 뿌리 동인
저서: 수필집 '솔바람 소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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