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지하는 가상화폐 3개 법안이 17일 미 하원을 통과했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의 규제틀을 마련하는 ‘지니어스 법안’은 상하원에서 모두 통과돼 미 정부의 친(親)가상화폐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가상화폐 대통령’ 트럼프의 서명만 남겨둔 상태다.
이 법안은 스테이블코인 사용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규제의 틀을 공식적으로 마련, 제도권 편입을 의미한 것이어서 화폐의 미래와 인터넷 금융 시스템에 있어 중대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밀어붙이고 있는 가상화폐 3개 법안은 디지털 자산 관련 규제를 명확히 하는 ‘클래러티 법안’,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발행을 금지하는 ‘CBDC 감시 국가 방지법안’, 스테이블코인의 제도권 편입을 의도하는 ‘지니어스 법안’ 등이다.
미 하원은 이번 주를 ‘크립토 위크’로 정하고 3개 법안을 이번 주 안에 통과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 14일 하원의 규칙안 표결 부결로 제동이 걸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 부랴부랴 공화당 하원 의원들 10여명을 백악관으로 불러 설득하는 등 물밑작업을 거쳐 16일 밤 규칙안 표결 통과, 17일 본회의 통과를 이끌어냈다.
▶스테이블코인 ‘효과’…국채 수요 증가, 재정적자 완화=스테이블코인은 미 국채 수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USDC(US Dollar Coin)나 USDT(US Dollar Tether) 등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은 국채를 담보로 보유해 안정성을 확보한다. 스테이블코인이 활성화될 경우 국채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1달러당 1코인 가치를 유지하고자 미국 단기국채를 담보로 보유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국채 수요가 증가한다. 예를 들어 USDC 발행사인 서클은 준비금의 88%를 12일 만기 국채로 보유한다. 지난달 기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보유한 미국 국채 규모는 1400억달러(약 194조6140억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국가의 중앙은행이 보유한 미 국채 규모와 맞먹는 수준이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오는 2028년까지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2조달러(약 2778조원) 규모로 성장하고 매년 4000억달러(약 555조원) 규모의 신규 국채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채 수요 증가는 미국의 심각한 재정적자를 완화해줄 것으로 예상된다.
▶스테이블코인, 달러 연동…달러패권 공고화=스테이블코인은 미국 달러에 연동된 디지털 자산이다. 달러 가격 안정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금융 및 상업적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 서클이 발행하는 USDC는 이더리움, 스텔라, 솔라나 등 다양한 블록체인에서 사용 가능하다.
미 달러 예치금으로 가치를 보장하고 있고, 미 연방 예금보험공사(FDIC) 보험이 적용되는 만큼 안전성이 강점이다. 시장 점유율 1위 스테이블코인인 USDT는 이달 기준 시가총액이 1584억달러(약 220조4294억원)에 이른다.
미국은 이러한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해 오히려 달러 패권을 강화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지난 5월 발표한 코인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1분기부터 2024년 2분기까지 USDT 거래의 90%가량이 미국 외에서 발생했다. 1584억달러(약 220조원)의 90%, 즉 1425억달러(약 198조원)가 스테이블코인 형태로 세계 각국에서 유통돼왔다는 의미다.
특히 물가 상승율이 가파른 신흥국에서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현지 물가가 급등해 화폐 가치가 급락한 나라들이 달러와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하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안정감 있게 결제나 저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금의 경우 환전을 거쳐 결제를 하려면 1~2일이 소요되고 환전 및 중개 수수료까지 부담해야 한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상대적으로 저렴한 송금 수수료만 부담하면 24시간 언제든 원하는 만큼 지불할 수 있어 더 효율적이다.
이러한 추세가 확산될 경우, 미국의 스테이블코인은 세계 각국의 통화량을 더욱 흡수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은 2500억달러(약 347조원)에 달하고, 이 중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은 98% 수준이다.
스테이블코인 유통량이 증가한다는 것은 곧 달러 수요가 증가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1코인에 상응하는 1달러 가치를 유지하고자 코인 시총 상당액을 달러로 보유한다. 1억코인을 발행한 경우 1억달러를 보유해야 한다.
발행사는 보유 달러의 70~80%를 만기 1년 미만 미국채를 매입하고, 여기서 발생한 이자로 수익을 올린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로 교환되고, 달러는 국채로 교환되는 자금의 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스테이블코인이 미 국채 수요까지 감당해주면 미국의 기축통화 지위는 강화된다. BIS는 5영업일 내 35억달러 규모의 스테이블코인이 미국 국채에 유입되면 10영업일 내 미국 국채 금리가 평균 0.02~0.025% 하락하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금리가 내려가면 미국은 국채를 발행하면서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된다.
미국의 기축통화 지위는 전 세계에서 미국 국채를 매입하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다. 이로써 달러가 세계 곳곳으로 퍼지고, 이 달러는 다시 미국채 매입에 투입되는 순환 구조가 이뤄지는 것이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이 미국 국채 수요를 떠받치면서 스테이블코인의 지위 강화는 달러 패권을 더욱 공고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달러약세 유도하는 트럼프와 엇박자?=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관세를 부과해 현재 적자인 대외 무역구조를 흑자로 전환시키겠다는 복안이다.
이와 더불어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흑자를 실현하고자 다른 한편으로 달러 약세를 추구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자본시장연구원의 ‘트럼프 행정부 관세·환율정책 분석 및 대응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적자의 근본적 원인이 달러 강세에 있다고 보고 관세 인상과 함께 달러 약세를 유도할 것으로 전망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1차 무역전쟁이 관세전쟁이었다면, 2차는 환율전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달러 약세란 달러 가치가 비교통화 대비 낮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환율이 올랐다’고 하면 달러 약세라는 의미다. 이 경우 미국의 수출품에 가격 경쟁이 생겨 수출이 확대될 수 있다.
그런데 하나금융연구소는 지난달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강세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스테이블코인 활성화를 뒷받침할 경우 달러 강세와 맞부딪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단 트럼프 대통령은 달러 약세로 무역 흑자를 추구하는 한편,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공고히 하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쫓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정부 고위직 5명 중 1명 가상자산 보유…트럼프 700억원=트럼프 대통령뿐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 자체가 가상화폐에 친화적이다. 17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트럼프 정부 고위직 인사 5명 중 1명이 가상화폐를 보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WP가 약 300명의 고위 인사 재산 공개 신고서를 검토한 결과, 70여명이 가상화폐를 보유하고 있거나 관련 기업에 투자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트럼프 내각 중 3분의 1 이상이 가상화폐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위직 인사는 최소 1억9300만달러(약 2686억원)의 가상화폐 자산을 신고했고, 트럼프 대통령도 5100만달러(약 709억원)의 가상화폐 관련 자산을 보유했다. 바이든 행정부 내각 관료 중 가상자산을 신고한 인사는 아무도 없었고, 역대 어떤 대통령도 가상자산을 보유한 적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큰 변화다.
해리슨 필즈 백악관 수석부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디지털 금융 기술에 대한 명확한 규제를 정립하고, 미국을 디지털 자산 경제의 세계적 리더로 만드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대형은행들 ‘환영’…가상화폐 업체들은 은행업 진출 ‘러시’=미국 대형 은행들은 잇따라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긍정적 입장을 내놓고 있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지난 15일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우리는 JP모건 예치금 코인(JPMD)과 스테이블코인 모두에 관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이먼 회장은 월가의 대표적인 가상화폐 회의론자다. 스테이블코인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다이먼 회장마저도 팔짱만 끼고 있을 형편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밝힌 것이라고 미 경제매체 CNBC는 풀이했다.
제인 프레이저 시티그룹 최고경영자(CEO)도 같은 날 실적 발표 후 콘퍼런스콜에서 “‘시티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브라이언 모이니한 CEO도 지난 2월 규제가 허용한다면 스테이블코인을 출시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특히 며칠씩 소요되는 국가 간 자금 이체에서 더 빠르고 저렴한 결제 서비스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미국 가상화폐 기업들은 은행업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트럼프 대통령이 약속한 친가상화폐 정책 환경에서 전통 금융 시스템에 뿌리를 내리려는 전략이라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분석했다.
가상화폐 엑스알피(XRP·리플) 발행사인 리플랩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인 서클(Circle), 디지털 자산 수탁사인 비트고(BitGo)가 미국 연방 당국인 통화감독청(OCC)에 내셔널 트러스트 뱅크 인가를 신청했다.
내셔널 트러스트 뱅크는 자산을 보관하거나 결제 처리를 할 수 있지만, 대출을 제공하거나 예금을 직접 받을 수는 없다.
브래드 갈링하우스 리플랩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일 엑스에 올린 글에서 은행인가 신청 사실을 알리고 “이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신뢰성을 나타내는 새롭고 특별한 기준”이라고 밝혔다.
그는 중앙은행인 연준에 마스터 계좌도 신청했다고 밝혔다. 승인되면 연준에 스테이블코인 준비금을 직접 보관할 수 있게 된다.
서클은 은행 인가 취득에 대해 디지털 자산을 광범위한 금융 시스템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단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오는 8월 체크카드와 신용카드를 출시할 계획인 가상화폐 거래소 크라켄(Kraken)의 아르준 세티 CEO는 “이것은 자연스러운 융합”이라고 말했다. (기사제휴=미주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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