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사례>
나는 병원에 그런 곳이 있는 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 칠십이 넘은 듯한 한인 환자와 나를 이층으로 데리고 올라간 남자는 의사였던지 의사를 보조하는 분이셨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하여튼 그곳은 어느 검소한 집의 부엌 같은 작은 서양식 부엌이었다.
병원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의아해 하면서 그 곳에 서 있으니 남자가 냉장고를 열면서 설명했다. 이 안에 계란이 있고, 저기 기름이 있고… 그가 냉장고를 떠나 서랍을 열며 “여기 기구들이 있고, 팬과 냄비는 이 아래 있고, 컵은 이 위에 있고 “ 그가 윗쪽 찬장을 열며 말했다.
그리고 그가 본론을 이야기 했다. “ 당신은 지금부터 계란 프라이 하나와 차 한 잔을 만드시오.” 나는 그대로 통역을 했다. 할아버지는 임무를 시작하려고 시도하다 나에게 다시 물으셨다. “뭐 뭐라고?.... 뭐 뭐 하라고?” “또 다시 반복해서 말하지 말라고 이 남자 분이 그랬어요.” 그가 탄원을 해도 난 또 설명하는 걸 냉정하게 거부했다.
들어온 정보를 머리 속에 갖고 있다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이 시험의 일부분이었으므로 그리할 수 없었다. 원망스러운 얼굴로 날 쏘아보다가 할 수 없이 그가 우물쭈물하면서 프라이 팬을 꺼내더니 불 위에 올려 놓았다.
불을 켜지는 않고… 그러더니 찬장 위 칸을 열고 컵을 꺼낸 후 냉장고에서 계란 하나를 꺼내 오더니 망설이다가 결국 탁 깨서 컵에 넣는다. 그리고 오락가락 주전자를 들고 왔다갔다 그러다가 그는 포기한 듯 가만히 있었다. 그 남자는 할아버지에게 “불합격”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통역을 잘못해서 자기가 불합격을 당한 거라고 내 탓을 하셔서 내가 몹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 할아버지가 그런 시험을 받은 이유는 자기는 멀쩡한데 병원에서 집에 안 보내 준다고 “집에 가고 싶다” 고 그 말을 병원에 해달라고 하셔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영어 공부를 위해 시립대학에 다니시는 분이셨다. 어느 눈이 많이 오던 날 대설 주의보 속에 학교에 오지 말라는 공고를 모르고 (기후가 이상하면 교육청 웹사이트를 보아야 한다) 할아버지는 학교에 갔다. 건물에 들어가시다 아차 펑 하고
넘어지셨는데 잠깐 정신을 잃으셨다. 엠블런스가 와서 병원으로 모시고 오셨는데….
병원 측은 혹시 뇌에 손상이 있으면 어떨까 해서 며칠을 병원에 두면서 지켜보는 모양이었다. 뇌에 이상이 있다면 사람은 예전에 잘하였던 일상적인 일을 못한다. 예를 들면 계란 프라이를 할 때 프라이 팬을 스토브 위에 올려 놓은 후 기름을 두른 후 불을 켜고 기다리다가 팬이 뜨거워지면 계란을 깨서 그 위에 붓는다.
이때 불을 켜고 팬을 올려 놓든, 팬을 올려 놓고 불을 켜든 또는 팬이 뜨거워진 후에 기름을 두르든지 처음부터 기름을 두르고 팬을 달구든지 원하는 결과를 만드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이렇게 약간의 순서가 바뀌는 면을 감안 하더라도 계란 프라이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순서대로 한다. 그 순서가 뇌에 정립된 스크립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계란을 깨서 컵에 부으신 거였다. 아무도 계란 프라이를 팬에 투입하기 전 계란을 컵에 넣지 않는다. 스크램블 에그를 하기 위해 대접에 계란을 넣고 이리저리 휘젓는다면 몰라도. 그 병원 남자는 분명 계란 프라이 하나 하라” 고 했는데…
영리하신 할아버지는 그 시험에 합격하여야 집에 갈 수 있다는 촉은 잡으셨는데 간 곳이 부엌이어서 당황하셨던 것이 사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눈에도 그는 정신이나 인지력에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유가 뇌에
문제가 있어서라기 보다 한국에 남자들이 어디 부엌에 들어가봤어야 말이지.
내 짐작으로 이 스크립은 뇌에 이상이 있나 살필 필요가 있을 때 병원에서 통상적으로 하는 의료 과정이 아닐까 싶다. 미국 문화는 부엌에 들어가 간단한 계란 요리나 차 한잔을 끓이는 일은 남녀 구분없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남자로서 고귀함이 손상당한다는 남존여비의 사상 속에 자란 세대의 한국 할아버지는 이일이 너무 힘겨운 일이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해보지 않은 일을 하라고 하니 많이 불만스럽고 당황했던 모양, 확신을 가지고 천천히 침착하게 해도 모자랄 판에 일을 그르치고 마셨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고소한 생각에 나 혼자 웃는다.
<두번째 사례>
“이렇게 늦게오면 어떻게 해?!” 할머니는 양손의 주먹을 야무지게 쥐고 머리는 공중으로 향했다가 발 빝으로 내렸다가 하면서 아래층에서부터 헐레벌떡 올라온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키가 무척 작았는데 주변에서 누가 이 모습을 봤다면 위를 올려다보며 왁왁거리는 모습이 좀 우수꽝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 나는 살짝 웃으며 사과를 했다. 이때 뭐 주차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또 리셉션 데스크가 줄이 길어 체크 인 하는데 오래 걸렸다 등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아 보았자 상대의 짜증만 돋굴 뿐이다. 상대는 어찌해서 늦었나에는 별 관심이 없고 늦었다는 사실에 그래서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에만 화가 날 뿐이다.
사실 그날 조금 늦은 것 때문에 의뢰인이 불이익을 받은 일은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사실 통역일을 하면서 10분 정도 늦었다고 이토록 호통을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통역을 부른 병원이 아닌 환자로부터.
그러나 이상하게 조금도 억울하다던가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며칠 전 할머니와 담당의사의 만남에서 의사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 투영 검사를 한 의사는 할머니의 뱃속에 뭐가 보인다고, 실제 작은 카메라를 위 속에 넣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육안으로 보고 또 조직도 떼어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때 동석한 통역이 바로 나였다.
할머니는 위 내시경을 하는 그날 조금이라도 빨리와서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예약 시간이 훨씬 되기도 전 병원에 오셨던 것이었는데 통역이 보이지 않으니 신경에 날이 선 거였다.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계실까 생각하니 그녀가 팔팔하게 생기가 있는데다가 불성실하게 늦게 온 통역에 대한 분노를 보일 때 그걸 탓할 수는 없었던거다.
며칠 전 의사 사무실에서 뱃속에 무언가 보인다고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한다고 통고를 받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머리 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처럼 감정이 흔들렸으리라. 하여간 미국 병원은 예약 순서대로 일을 진행하지 누가 일찍 온다고 빨리 서비스를 해주진 않는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온 환자가 도착을 알려도 시간이 안됐으면 그냥 기다리게 한다. 아마 그 앞에 예약된 환자를 먼저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간호사가 나와 들어오라고 부르기를 학수고대하는 할머니의 조바심에는 아랑곳 없이 이미 예약 시간에서 반시간이 넘어가도록 안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함께 온 할아버지가 약속 시간이 훨씬 넘어가는데 안 부른다고 투덜투덜하시며 나의 기분을 살피시는 듯 쓴 입 맛을 다셨다. 통역이 늦어 일을 그르치기는 커녕 어차피 일찍 왔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데 괜히 할머니가 언성을 높였다고 무안하신가 보았다. 하여튼 이윽고 간호사가 와서 할머니와 나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옷을 환자복으로 바꿔입게 하고, 할머니는 침대에 누었다.
주사줄을 설치하고, 약 섭생, 병력, 알레르기 반응 등을 첵크하고… 그러고는 또 기다리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할머니는 이왕 늦어지는 데 신상 이야기나 하자고 작정하셨는지 이것저것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셨다. 보통 자신은 하고 싶은 말은 동양 사람은 물론이고 서양 사람에게도 당당하게 참지 않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예로 할머니는 근래에 버르장머리 없는 이웃 서양 아이에게 말로 펀치를 날린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하셨다. 나는 우스운 대목에서는 유쾌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여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따뜻한 손길이 나에게 느껴졌다. 할머니가 내 손을 살며시 잡은 것이다. “아까 내가 소리질러 미안해!” 나는 그녀의 손 위에 나의 손을 겹쳐 잡으며 가만히 속삭였다. “아니 괜찮아요 제가 늦은 걸요 뭐.”
김미순
워싱턴주 기독문인협회 회원
전문통역인, 워싱턴주 한국인 간병교육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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