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한 집안에 적막을 흔드는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소리에 놀라 송수화기를 얼른 집어 드니 반가운 LA 친구가 어느새 시애틀에 왔단다. 지난 2월 내가 LA 갔을 땐 피차 시간 때문에 섭섭하게도 만나지 못했단 기억과 더불어 5월에 시애틀에서 만나자던 말이 떠올랐다.
친구를 마음 한편으로 반기면서도 머리속으론 시간을 계산해야만 했다. 서울 큰아들이 워싱턴DC 출장 마치고 집에 잠깐 들리기로 했으니 그 또한 손꼽아 기다리는 일이다. “아무리 사정이 그렇더라도 시간을 쪼개서라도 당연히 친구를 만나리라.” 당장 친구네랑 심심찮게 가던 추억어린 식당에 다음날 저녁 예약을 했다.
우린 시애틀에서 적어도 10년간 아주 좋은 관계로 지냈다. 사람 사귀기 어렵다는 이민사회에서 드물게 만난 좋은 친구였다. 무엇보다 피차 예의를 잘 지켜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 같은 교회를 다니며 시간 있을 때마다 여행도 했다. 천혜의 자연이 수려한 바다건너로 캠핑가 온천욕도 하고 배타고 낚시도 즐겼다.
언젠가는 미국지도에서 워싱턴주 제일 서북쪽 끄트머리 삐죽이 나간 니어베이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점심도 잊고 파도치는 바위꼭대기에 올라서서 은도미를 잡아주던 친구 부군. 사람 좋은 친구 부군은 그날 따라 우리를 당신 집에서 자고 가라고 붙들었다. 은도미로 회뜨고 매운탕도 끓여 저녁으로 맛있게 먹었던 일도 이젠 아스라하다. 친구네는 직업상 어쩔 수없이 주말부부로 지내며 부군은 낚시로 고독을 달래지 싶었다.
언젠가 우리 친구 일행이 쏠트 크릭으로 캠핑을 갔다. 아침에 남자분들 낚시하는 걸 구경가려니 물 빠진 바닷가 홍합 밭을 미안하게도 밟고 가야만 했다. 그 바다에서 청색 속살을 가진 귀한 생선을 잡아 회 떠서 맛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날 그렇게 좋은 친구네가 섭섭하게도 LA로 이사를 간단다. 친구네도 못내 서운한지 몇 년 후에 다시 온다고 집도 세놓고 떠났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서 아예 그곳 사람이 되고 말았다. 친구네가 이사 가고 몇 번 다녀갔다. 우린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최선을 다했다. 공항에 마중 나가고 친구들을 불러모아 맛있는 저녁을 나누고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별찮은 일로 남자들끼리 오해가 생겼다. 그때 난 무엇보다 좋은 친구를 잃을까 안타까웠다. 곰곰이 생각하다 내가 아는 그 일에 대해 세밀한 편지를 보냈다. 친구를 잃지 않으려고 옆구리 찔러 절 받기 한다는 이야기도 솔직히 했다. 그러나 친구부군의 기억은 ‘내가 그랬다’라고 하지만, 자존심이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라는 쪽으로 기울어 갔다. 그럴 땐 나중을 생각해서 그냥 못이기는 척했으면 싶었지만, 너무나도 완강한 친구부군을 우리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그 후 어느날 우리 가족이 캐나다 여행 마치고 막 집에 들어선 순간 다른 친구가 전화해서 LA 친구를 바꿔줬다. “우리 시애틀에 왔는데, 보고 싶으니까 무조건 빨리 와” 명령 아닌 명령을 한다. 난 며칠간 여행으로 몹시 지쳤지만 “알았어, 지금 갈게” 하고 그 길로 나섰다. 가면서 “우린 그냥 반가운 친구 보러 가는거니까 가서 잘하고 오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친구 부군이 오히려 성을 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니 그냥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나서서 만류하는 바람에 불편한대로 참고 있다 왔다. 그러다 저러다 그만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런데 어쩌라고 때때로 친구가 잊히지 않고 보고싶다.
2007년 내가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수상식에 가기 전에 지인을 통해 드디어 그 친구를 8년 만에 찾았다. 어렴풋이 친구가 다닌다는 교회 이름을 기억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교회는 워낙 커서 한 다섯 군데 교인을 합치면 너무 많아 찾기가 어려울 거라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찾아서 내가 전화했다. 친구가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우리는 마치 전쟁으로 잃었던 핏줄이라도 다시 찾은 듯싶었다. 내가 LA 여동생 집에 머무는걸 알고 건강하지도 못한 친구가 꽃다발을 안고 무려 두 시간이나 운전해서 찾아왔던 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라.
우린 하루종일 그 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소식이 끊어진 사이에 친구는 친구대로 큰 병으로 자칫 위험한 상황에서 뇌수술을 했단다. 그로써 판단력이 흐려져 비즈니스마저 그만두고 일찍 은퇴했다고 한다.
친구는 내가 공항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는 말을 동생을 통해 듣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더라고 한다. 나 또한 소식 끊긴 사이 인생을 뒤엎는 큰 병을 두 가지나 만났다. 처음 병은 자고 나니 균형을 잃어 일인오역을 하며 수퍼우먼 소리 듣던 여장부가 커피 한잔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상황은 여전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장애자가 된 것으로서 내 인생에 더 이상 어려운 일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웬걸 4년 후 또 다시 암에 걸리고 말았다. 이미 암보다 가볍지 않은 병마로 의지대로 살지 못하며 하도 시달려서 마음을 있는 대로 다 내려놓아서 그런지 눈물없이 수술대에 올랐다.
사실 나를 달래며 ‘괜찮아, 괜찮아’ 했지만 머리 속에선 어쩔 수없이 집채만 한 파도가 너울져 덮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가족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잘했던 것 같다.
친구는 그날 내가 친구 부군도 같이 만나자고 했으면 같이 오려고 했는데 하고 아쉬워한다. 그런데 난 혼자 가서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안했다. 친구는 내 “건강이 웬만하면 같이 집에 가 자고 온천도 가려고 했는데” 하며 또 안타까워한다.
그렇게 우리는 가면 만나고 카드와 전화도 주고받으며 내 글이 중앙일보에 게재되는 걸 친구는 날 보듯 즐겁게 읽는단다. 그이 역시 나를 통해 친구 부군에게 안부 전하기를 잊지 않았다.
정말 친구네가 LA에서 차로 1134마일을 달려왔다. 차로 오기엔 너무 먼 거리라 오다가 하루 밤자고 왔다고 한다. 진실한 친구 부군은 만나자마자 “그 동안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어.” 그이 손을 잡고 아름다운 화해를 요청한다. 손을 맞잡은 그이 역시 “벌써 다 잊어버렸는데, 뭘 그러느냐”고 한다.
아, 정말 가슴이 따뜻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진솔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이런 게 아닌가 싶으면서 그리 생각해 주는 친구 부군이 정말 고맙다. 친구 부군은 “그때 친구들 모임에서 내가 속 좁게 그러지만 않았어도 좋았을걸, 난 왜 그런지 몰라” 하고 후회한다. 우리는 이틀간 늦은 밤시간까지 회포를 풀었다.
맞다. 심밀한 사람이라면 그리하는 게 옳으리라. 우리는 친구의 그런 속내까지를 헤아리기에 그들을 더 좋아하고 그리워한 게 아니었을가. 대개의 사람들은 설령 자신의 잘못을 나중에 분명 깨달아도 친구를 잃고 말지언정 잘난 자존심을 지키려고 그리하지 않는다. 그 또한 솔직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에.
친구네는 은퇴 후 답답한 시간이 많단다. 궁리 끝에 도심을 벗어난 지역으로 이사해 제법 넓은 땅이 생겼단다. 이제 인생 2막으로 뒤늦게 농사로 소일을 한단다. 전형적인 도시인으로서 생전 처음 해보는 농사 재미가 꽤 쏠쏠하다며 이웃 경험자가 하나하나 잘 가르쳐줘 빨리 배웠단다. 텃밭에 유기농 채소를 골고루 심어 친지들과 나누는 행복 또한 대단하단다. 자연에서 그야말로 무공해 엔도르핀을 얻으니 건강 지킴이로 잘한 선택이지 싶다.
살면서 마음 맞는 친구와 같이 건강하게 늙어 간다는 건 하나의 커다란 행복의 조건이리라. 그런 이론을 알면서도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렵기만 하다. 친구야, 난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돈보다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단다.”
그런 인생경험을 바탕 삼아 ‘끝까지 꼭 찾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LA 친구를 찾으려고 노력한 결과 찾아낸 것’이리라. 그런 저런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다시 또 그 친구를 찾은 건 참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 좋은 친구 부군은 지금도
우리를 오라고 전화로 불러댄다.
이번엔 우리가 기회를 봐서 다녀오기로 했다. 그다음엔 친구네가 우리집에 오기로 했다. 우리 그이 역시 사람을 너무 좋아해
“24시간 문 열어놓고 아무나 와도 좋소” 하니 뜻이 잘 맞는 것이리라.
작별을 애석해하며 화가인 그이는 정성껏 그린 그림 한 점을 선물했다. 난 친구 내외의 건강을 빌며 내가 만든 떡과 과일을 우정의 보자기에 싸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건넸다. “참된 친구는 건강과 같다”고 한다. 진정 그 친구를 잃기 전에는 그 값어치를 모르기 때문이리라.
박유선
수필가, 월간 <수필 문학> 등단
미주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부분) 당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 수필집 '길 없는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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