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을 떠나며 마음 아팠던 것 중엔 100여가지의 꽃과 채마 밭이 어우러진 뒤뜰과의 이별이었다. 새 둥지에 와서 텃밭 마련을 궁리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러 해가 지나 이제 텃밭을 얻었다.
우리는 대단한 농사꾼이나 된 듯 기분이 붕떴다. 농사 일은 나름 시애틀에서 실패를 거듭하며 배운 노하우가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무늬만 도시 농사꾼이지만.
한국 채소를 심자. 대파, 부추, 마늘, 들깨, 조선 호박, 그리고 토마토 등을 심으리라. 또한 한국 참외도 심고 수박도 심었다. 잘 익은 붉은 수수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던 농촌의 평화스러움을 보았던 젊은 날이 떠올라 수수도 심자.
밭 하나는 꽃을 심어 이웃과 행복을 나누리라. 한데 그이는 돈 주고 빌린 텃밭에 왜 꽃을 심느냐고 마땅치 않아 한다. 이웃 밭 주인들은 우리 꽃밭을 보면 금방 만면에 웃음을 쏟아내며 꽃과 얽힌 추억을 떠올린다.
어느 날 우연히 유명한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 (무엇이 성공인가)라는 시를 노트에 베껴 쓰며 읽었다. 끝 단락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그리고 내가 그이에게 ‘이 밭은 내마음대로 꽃을 심을 테니 건드리지 말아요’했던 말이 생각났다. 또한 우리 지구를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하는 일에 일조하는 일이기에.
모종을 사고 씨앗을 얻어 다 심고 집에서 10분 거리가 채 안되는 밭에 날마다 출근하는 것이 하나의 저녁일과다. 그곳은 평화스럽고 자유로운 곳이다. 시간이 가고 고물고물 그 작은 씨앗에서 신기하게 싹이 튼다. 그건 하나의 생명이며 희망이다.
그런데 화초처럼 키워 예쁘게 자라던 상추를 뭔가 가 싹쓰리해 뜯어먹었다. 아, 마음이 아프다. 마치 내 살갗에 누가 상처를 낸 듯이. 우린 둘이 동시에 ‘이건 토끼 짓이야’ 하고 본 듯이 단정했다. 철망 울타리를 허리 높이로 둘러쳤다. 이러면 아마 못 건드리겠지?
한데 그게 아니었다. 계속 뭔가 가 뜯어먹는다. 속상하고 보기 싫다. 옆 사람들도 하나같이 그럼 새가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밭주인들은 하나 둘 새그물망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도 기둥을 세우고 그물망을 치는 일을 며칠에 걸쳐서 했다.
우린 ‘이젠 끄떡없을 걸’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데 또? 그럼 토끼도 아니고 새도 아니라면 뭐가 그러는 거야? 참, 속상한 일이다.
시애틀에선 어쩌다 토끼가 와서 상추 잎 정도를 잠깐 따 먹는게 전부였다. 그건 귀여워서 ‘그래,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나눠 먹자’ 하면서 개의치 않았는데.
다만 징그러운 민달팽이와의 전쟁은 너무 싫다. 그래도 그건 여기에 비하면 양반이네 싶다. 결국 다람쥐가 범인임을 알아냈다. 옛말에 도둑 맞은 사람이 죄가 더 크다더니 괜스레 토끼랑 새들을 범인으로 찍은 일이 미안스럽다.
도토리만 먹는 줄 알았던 귀여운 다람쥐는 잡식성이라 열매는 물론 보드라운 잎채소도 다 먹어 치운다. 토마토도 뜯어먹다 버리고 껄끄러운 호박 잎까지도 먹어 치운다.
또한 날마다 조금씩 호박, 수박, 오이까지 다 갉아먹는다. 다람쥐는 조그만 구멍만 있어도 들어와 해 꼬지를 하니 우리 또한 틈을 막느라 애쓴 결과 이젠 괜찮다.
그런데 여기 짐승은 좀 너무 극성맞다. 큰 도시가 돼서 짐승도 생존경쟁이 심해서 그런 것일까? 누군가는 사막 같은 곳이라 먹이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한다.
다람쥐가 안 먹는 몇 가지는 파, 마늘, 부추, 들깨라는 걸 경험으로 알아냈다. 냄새가 독특하고 맵기도 해서 인가 싶다. 토마토는 사람 키를 훌쩍 넘게 잘 자라서 붉게 익어간다. 밭에 토마토가 있는 가족은 건강해 병원에 오지 않으니, 의사 얼굴이 뻘개진다지?
가끔 친구들과 밭에 가 잘 익은 토마토를 따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싱싱한 부추를 잘라서 나눈다. 말이 인삼, 녹용 보다 좋다는 부추는 특히 정력에 좋을 뿐더러 성인병 예방에도 좋단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이 너무 좋아한다.
들깨 씨를 뿌리니 소복이 나왔다. 속아낸 줄기 들깨를 전을 부치니 향긋하니 맛이 아주 좋다. 풍부한 비타민C와 루테올린 성분은 각각 감기예방, 염증완화의 효과가 있다.
특히 루테올린은 항알레르기 효능이 있어서 기침이나 콧물, 재채기 등의 개선에 도움이 된다. 또한 빈혈을 예방하고 성장 발달에 도움이 되는 철분이 많으니 쓸모가 많은 채소다.
조선 호박 잎을 쪄서 저녁 식탁에 올리니 별미가 따로 없다. 호박이 안 달린다고 ‘물값도 못하네’ 하고 구박을 했더니 아주 예쁜 미인 호박이 보란듯이 맺혔다. 처음 얻은 귀한 품종이다. 우리는 작물은 물론 씨앗도 이웃 밭 주인들과 나눈다.
지역마다 있을 커뮤니티 가든이라 부르는 밭은 말그대로 넓은 땅을 공동으로 나눠 텃밭으로 쓴다. 작지 않은 크기에 거름 흙도 그냥 주고 물값도 따로 없다. 여러 큰 상점에서 필요한 것을 무료로 주기도 하니 도시안에서 자연을 즐기는 시민들 정신건강에도 보탬이 된다.
가끔 공동체 회원들이 모여 바베큐 파티도 하며 공동작업도 한다. 사용료는 년간 100달러니 해 볼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무엇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디작은 씨앗에서 싹이 터 생명이 곰실거리며 자라는 모습에 매료되어 텃밭일을 즐긴다.
박유선
수필가, 월간 <수필 문학> 등단
미주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부분) 당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 수필집 '길 없는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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