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창밖에 눈이 내린다. 2021년의 첫눈이다. 시애틀에 이민을 온 지 10여 년 만에 맞는 대설이다. 내가 창문을 열고 서쪽 덱으로 나가 손뼘으로 적설량을 재 보니, 한뼘 정도이다.
이튿날이 밝았다. 창밖에는 눈송이가 퍼붓는다. 온라인 신문은 어제 2월 13일 시애틀 지역에 내린 적설량은 8.9인치이며 50년 만의 폭설이라고 보도하였다. 아내가 비를 들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누군가가 우리 집 문밖의 눈을 치워 버렸다고 하였다.
월요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기에 아내가 문밖에 나갔더니, 옆집의 부인이 이르기를 앞집 남자가 우리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웠다고 하였다. 우리는 앞집 주인이 베풀어 준 인정이 무척 고마웠다. 마을 응달에 쌓인 눈덩이가 녹자, 아내가 감사의 표시로 과일을 사서 그 집을 찾아갔다. 나는 인심이란 마을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기억도 생생한 2016년 1월 16일의 일이다. 우리 부부는 그날 오후 북행 버스를 타고 시애틀을 향해 집을 나섰다. 워싱턴대학교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한국 학생들과 동포들에게 한국 책을 소개하기 위해 달마다 주관하는 북 토크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프로그램을 동아시아 도서관에서는 ‛Booksori’라고 부른다.
워싱턴대학교 고언 홀의 301 강의실에 들어가 자리를 찾노라니, 많은 사람이 와서 자리 찾기가 힘들었다.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비치는 강의실을 둘러보니, 350여 명의 시청자가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마침 남녀 학생 둘이 우리에게 자리를 성큼 내주더니, 빈자리 하나를 발견하고 그리 가서 같이 앉았다. 자리 하나에 붙어 앉아 있는 그들을 보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이윽고 탈북 인권 운동가라는 박연미가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섰다. 용모가 어리고 키가 훤칠해 보였다. 박연미는 굶주림에 시달려 2007년 3월에 어머니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탈출했다고 한국어로 말하였다. 한국인 유학생들이 통역을 맡았다.
중국 땅에 도착하니, 인신매매 업자들이 나타났다. 업자들은 당국에 연락해서 자기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게 하겠다고 협박해서, 어머니는 650불에 자기는 2,000불보다 낮은 값에 그들에게 팔렸다고 하였다.
모녀는 2009년 3월 어느 날 몹시 추운 밤에 손전등과 면도칼과 독약을 품에 넣고 북녘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을 향해 발길을 옮겨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 땅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피난민 수용소에 있다가 그해 4월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연사의 말이 끝나자 큰 박수가 쏟아졌다.
워싱턴대학 북한 인권 동아리는 추천으로 시청자 5명을 뽑아 연사의 서명이 담긴 『In Order to Live: A North Korean Girl’s Journey to Freedom』이라는 책을 나눠주었다. 제목이 ‛살기 위하여: 한 북한 소녀의 자유를 향한 여정’이라는 뜻인데, 나도 책을 받았으며 연사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우리 노부부가 평안히 앉아서 강연을 듣게해준 학생들의 온정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옛날에 내가 청주 북쪽에 있는 수름재라는 고향 마을에서 시내에 있는 초등학교까지 6km가 되는 신작로를 걸어다니던 시절이었다. 어느 가을날 우리 집 텃밭의 감나무 밑에서 홍시를 많이 주었다. 가을에는 감이 많히 열리는데, 벌레가 꼭지에 구멍을 내고 속으로 들어가면 연한 홍시가 되어 떨어진다.
하루는 홍시를 바구니에 담아, 신작로로 나가서 행인들에게 팔았다. 그러자 갓을 쓴 노인이 다가와서 홍시를 모두 드시고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시었다. 나는 그 노인이 그지없이 고마웠다. 건넛동네에 사는 노인이었다. 집에 돌아와 홍시를 팔아서 번 돈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웃으시며, “노인들에게는 홍시를 그냥 드려라”고 하시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여름 방학 때 아버지의 농사를 도와드렸다. 아버지는 자전거로 도청에 다니시면서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으셨기에 집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였다. 바쁜 머슴 대신에 소에게 먹일 꼴을 낫으로 베다가 손을 베면 손가락에 흉터가 생겼다.
방학이 끝날 때 흉터를 세보니 열 군데나 되었다. 어머니의 눈썹을 닮은 흉터들을 보노라면, 어머니 모습이 눈앞에 선하였다.
어느 해 봄철에는 신작로 가에 민들레가 많이 피었다. 민들레의 뿌리는 약재로 쓰인다. 민들레가 하얀 솜털이 달린 씨를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정다워 보였다. 동무들에게 멋을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어느새 우리 뾰족집 마을의 벚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벚나무가 눈송이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마을에서 여러 인종과 좋은 이웃이 되어 사노라니, 노인들에게는 홍시를 그냥 드리라고 하시던 어머님 말씀이 떠오른다.
이경구
수필가. 1998년 <한국수필> 등단
작품집: 소렌토 아리랑, 시애틀의 낮달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
현재 위싱턴주 뷰리엔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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