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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0/11/19  조이시애틀뉴스
[조이문학] 해마다 봄이 되면 ...공순해

이곳에 도착하기 전 떠나온 곳에서는 비를 친근하게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봄비는 쌀비, 여름비, 잠비, 가을비 떡비, 그리고 겨울비 술비. 농경 사회의 끝자락에 태를 묻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그리운 다정한 말들이다.


벼를 자라게 하는 쌀비, 긴긴 여름 들일로 나른한 육신에 비라도 올라치면 슬며시 어깨를 타고 오르며 잠을 재촉하던 잠비, 시월 상달 집집이 고사떡 시루를 안치게 하던 풍요의 떡비, 그리고 농사 끝나고 휴식을 취할 때 마을 사랑방에 모여 앉아 추렴으로 술마시게 하던 술비. 그러나 이제 이 말들은 농경 사회의 한 풍경을 전할 뿐 오늘의 삶, 그리고 여기 이국의 삶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지난 가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질주의 현장이기에 보이는 다른 사물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이 지워진 그 공간에서는 오직 속도만이 존재였다. 그러기에 시야는 넓게 확 터져 있었지만 마음속의 시야는 오직 도착지에 꽂혀 있었다.


달에 갔다 왔지만 이웃과 더욱 멀어지고, 공기정화기가 있지만 영혼은 더욱 오염됐다는 현대의 역설이 그 순간 그 고속도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그래서 마음 한 모서리가 허수해진 순간, 길은 다른 숫자의 고속도로 연결로로 이어져 가고 있었다. 그 램프 갓길엔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가을이었기에 나무들은 무성했던 잎들을 발밑으로 모두 떨궈 발등을 덮고 있었다. 갖가지 색깔의 나무 이불들, 낯익은 광경이었다.


그 순간 거기 봄이 잠들어 있음을 보았다. 나무 이불들이 봄을 덮어 고요히 재우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땅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이루어지는 쉼 없는 작업이구나. 봄의 풍요로움이 왜 하필 잎을 떨구는 철에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게다 이젠 쓰이지 않는 떡비라는 말조차 그 모습 위에 겹쳐졌다. 봄이 풍요롭기 위해선 가을의 풍요가 전제되어야 한단 걸까. 하기에 뒤미처 떠오른 시 한 구절이 몹시 실감나게 느껴졌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지난 겨울은 비가 비의 도시란 이름이 무색하게 숭숭 구멍 뚫린 떡갈나무 잎들같이 산발적으로 내렸다. 그러니 눈도 귀했다. 아이들은 겨울이란 말만 들어도 스키장 갈 꿈에 부풀어 장비 챙길 궁리를 하건만. 스노퀄미 스키장 티켓을 일찍 예매해 두었던 어느 가정은 그 티켓이 무효가 될까 봐 애가 닳았단다.


어느 아침, 뒤뜰 덱에 눈이 살짝 깔렸다. 유리창 밖을 내다보던 아이들이 환호를 올렸다. 예에~! 우리 스키장 갈 수 있는 거지요? 저 눈으론 어림없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실망해 풀 죽을 얼굴 보기가 영 안쓰럽다. 아이들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말끄러미 대답을 재촉한다. 대답 대신 혼자 현관문 밖으로 나가 개나리 밑동을 보았다. 소보록하게 쌓인 눈이 깨끗하다.


쭈그리고 앉아 그 눈을 맥쩍게 막대기로 찔러 보았다. 눈 한 줌이 떨어져 나가며 밑에 숨죽이고 있던 파란 잎들이 드러났다. 아뿔싸! 저 잎들은 눈 이불을 덮고 봄 꿈을 꾸고 있었구나.


술비 오는 날 파전 부쳐 막걸리 마시는 호사도 없는 생소한 고장이건만, 그래도 그분의 뜻대로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물은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을 간직하고 있구나. 자발 없는 행위를 후회하며 머쓱해진 가운데 시 한 구절이 입속에서 불쑥 살아났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날씨가 화창하다. 이르게 다가온 봄이 낡은 것들을 사정없이 벗겨낸다. 개나리가 자발머리없이 활짝 몸을 열었다. 단풍나무도 오종종한 꽃을 매달고 섣부르게 봄을 영접하고 있다. 한데 왜 그 노란색과 붉은색이 희게 보이는 걸까. 맛이 가는 눈이 이젠 색깔조차 구별 못 하게 됐나.


시무룩해진 날, 그러나 변명거리를 발견했다. 회화에 관심이 많았던 20세기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란 사람이 그의 현상학 이론에서 인간은 신체 감각기관을 통해 굴절된 모습으로만 외부세계를 지각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뇌의 정보 처리 때문에 같은 옷 색깔도 극단적으로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그 기사는 그러니 인간 또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얼마나 주관과 편견이 많이 섞여 있겠느냐는 논지였는데, 나는 옳지, 쾌재를 불렀다. 적어도 시력 탓은 면하게 됐으니까.


이러니 모든 사물은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며, 이것이 품은 함의를 찾아내는 일이 예술이란 작업이며, 숨이 다하는 날까지 글로 천착해 볼 수 있겠구나, 안도의 기쁨 비슷한 감정이 슬그머니 옆구리를 찔렀다.


그때 느닷없이 기다려도 오지 않던 다정한 선물처럼 빗방울이 이마에 듣기 시작했다. 거 봐라, 봄비는 쌀비라 하잖던가. 생명을 키우는 거룩한 쌀비. 하니까 항상 새롭게 눈뜨고 있어야지. 항상 봄처럼 새로워야지.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은 대지의 눈.


그러자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이 입속에서 되살아났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이 글의 틀은 고 조병화 시인의 시 '해마다 봄이 되면'을 차용해 이루어졌습니다. 작고하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공순해
수필가
전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장
제6회 재미수필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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