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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0/05/20  조이시애틀뉴스
[레지나 칼럼] 펜데믹에 생각나는 이야기

나의 엄마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시는 법이 없었다.


집동네 시장에서 두 다리가 없는데 다리에 오래된 차바퀴 고무 타이어로 길게 늘여서 하체를 커버하고는 배로 시장 바닥을 기어서 밀고 다니며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병식이 오빠(엄마는 우리집 막내딸인 나에게 병식이더러 꼭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다)가 있었다.


물론 난 엄마가 보는데에서는 병식이를 불러야 한다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겨우 병식이 오빠라고 불렀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으시면 절대로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병식이는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하고 함께 살았는데 병식이가 시장바닥을 돌면서 카세트 팔아 벌어온 돈으로 할머니와 함께 먹고 살던 기억이 난다.


우리 동네에서 조금 더 가면 동순네 문간방에 시장 안에 비좁은 우리안에 가두어 놓은 닭을 잡아서 파는 집 옆에, 밤새 부풀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도너츠를 만들어 파는 영경이네 집이 있었다.


영경이는 9살이고 두 동생은 아직 어려서 영경이 엄마와 아빠가 일하러 가시면 영경이는 그어린 나이에 두 동생들을 씻기고 먹이느라 그가냘픈 몸이 더 까맣게 변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아이들이 자기네들끼리 지내는 모습이 안스러웠는지 우리집에서 별미라도 할냥이면 영경이네 세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오셔서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도 먹이고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살펴봐주고 하였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음식을 잘하셔서 엄마가 만드신 것은 그무엇이든 맛이 있었다. 겨울이면 감자를 갈아서 감자전도 만들어주시고 여름에는 아카시아 꽃을 따셔서 아카시아 설기도 해주시고 봄이면 쑥을 뜯어다가 밀가루로 개떡도 만들어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엄마가 만든 음식 중 특별히 여름이면 생각나는 간식은 막내오빠를 시켜서 활짝 핀 아카시아 꽃을 잔뜩 따오라고 시키시고는 아카시아 꽃을 물로 깨끗이 씻으신 다음 쌀가루를 휘휘 뿌려 찜통에 찌셔서 커다란 소쿠리에 담아내신 후 우리 형제들과 병식이 오빠, 그리고 영경이와 두 동생에게 먹이시고는 했다.                


엄마가 만드신 간식 중에는 엄마가 밀가루에 이스트를 넣고 진빵을 쪄주시기도 하셨는데 지금도 엄마의 손맛이 그대로 기억에 남는다.


가을이 되어 추석날이면 아버지는 송편을 아버지 손바닥 만하게 만드시면서 안에는 고명을 넣으셨는데 그 고명은 파란콩을 찐것으로 추석이 한참지나고 나서 광속에서 꾸들꾸들 말리어져가는 송편 안에 있는 달콤한 콩을 먹는 즐거움은 지금도 그리움이다.


우리 가족들이 음식을 먹으려고 밥상 주위에 둘러 앉아있으면 영경이 형제들이 창문너머로 우리집을 기웃거리기도 하여서 나는 창문을 수건으로 가리기도 하다가 엄마에게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수건으로 창문을 가리려는 나를 불러 세우시면서 말씀을 하셨다. 야! 막내야, 음식은 나누어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이란다. 그리고 영경이네는 엄마 아빠가 장사 나가시고 안계시잖느냐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눈을 빤히 쳐다 보셨었다.


나는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그아이들이 다먹어버리는 것도 싫었고, 또한 영경이네 세 형제가 오고나면 우리들이 먹는게 쉽게 줄어드니 아마도 어린마음에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식구들만의 시간이 그리워서 그랬던 것 같다.


엄마의 아버지이셨던 내 외조부님은 조치원에서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면서 한의사이시기도 하셨는데 내 어릴적 기억의 할아버지 집 앞에는 할아버지에게 침 맞으러 오시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줄을 서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께서는 산과 들에서 캐오신 약초를 다려서 한약도 만들어주시고 시간되시는대로 농사일 하다가 허리가 삐끗해서 오시는 사람, 발목을 접질러서 겨우 걸어들어오는 분들에게 침을 꽂아놓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쑥뜸도 놓아주시고는 했는데 얼마 후에는 그분들이 쌩쌩하게 걸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할아버지 처럼 한의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했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이분들의 치료를 거의 그냥 해주셨던 기억인데 아마도 할아버지 광에 곡식이니 과일 등이 떨어진 기억이 없는 것은 할아버지에게 치료를 받고 인사로 들고 오신분들이 많이 계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엄마와 이모와 삼촌들에게 음식은 나누어 먹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일까 우리 형제들은 남들하고 나누는 것이 불편하지가 않다.


그리 큰부자는 아니었지만 있는 것을 가지고 나눌 수 있던 삶을 사셨던 엄마의 삶이 우리 형제들에게 전해진 듯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알고있는 것이 있으면 누구가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내가 알고있는 것을 알려주면 더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니까 그점이 즐거운 것이다.


시카고에 살면서 학교에 다닐때에는 학생신분으로 시카고한인회에서 봉사위원으로 한인회일을 도우면서 시카고 최초로 무궁화 아파트 세우는 일에도 참여를 하고, 하와이에 살때는 하와이 국민학교에서 스쿨 카운셀러로 일을 하며 리후아, 펄시티, 마카킬로 세 국민학교를 담당을 하며 여기에 살고있는 집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애프터스쿨 프로그램도 만들어서 아이들을 돌보아주고 또 아이들을 모아서 바닷가로 나가서 함께 놀아주었던 기억들이 새롭다.


시애틀로 와서는 통합한글학교 교감으로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고등부학생들을 가르치며 즐거운 시간도 보냈었던 기억이 새롭고, 90년대 초에는 한인회에서 어르신들 영어교육을 담당하면서 노인분들 96명이 시민권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시민권 시험 문제에 소셜넘버를 외워야 하는데 어머님들 중에는 학교엘 다녀보지 않은분들도 많이 계셨는데 난 이분들에게 문제와 답을 외우게 하는 방법을 만들어서 문제를 재미있게 외우도록 공부를 시켰다. 그중 어느 할머님은  본인 소셜넘버를 영어로 외우는 것도 벅찬데 남편것까지 외우려니 애를 먹고 계신데 그중 한분 할머님은 겨우 본인의 소셜넘버를 잘외워놓고는 아이구야! 니 참 잘갔데이! 하시면서 돌아가신 분에게 감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계속)

 

 

 

레지나 채
소셜워커, 워싱턴가정상담소 소장

(206) 351-3108, chaelee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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