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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0/04/03  조이시애틀뉴스
[서울통신] 생각나는 친구 이지영


얼마 전 월간 ‘샘터’ 잡지가 창간 50주년을 앞두고 무기한 휴간과 사실상 폐간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1970년 4월 첫 호가 발간된 ‘샘터’는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문화 교양지 소책자’로 말 그대로 샘터같이 촉촉한 잡지였는데 아쉬웠다.


고등학교 다닐 때 ‘샘터’를 가지고 다니던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한국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했으나 막상 등록은 하지 않고 언니가 있는 미국에 갔다. 며칠 전 시청 앞을 다녀오다 길 건너를 바라보니 회색빛 하늘 아래 정동 성공회 성당 건물이 그날따라 운치를 발하며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곳은 그 친구가 미국 가기 전 단신으로 머물렀던 기숙사가 있던 장소이다.


그 친구는 자신을 이지영이라고 불렀다. 학교에서 부르는 이름이 있었는데 미국에 간 후 보내온 편지봉투에는 이 이름을 썼다. 지영이는 지금도 미국에 살고 있을까? 혹시 이 글을 보면 연락해주면 좋겠다. 책꽂이에서 앨범을 꺼내 그녀 사진을 찾아보니, 학창시절 나와 찍은 사진들이 있고 그 이외에 그녀가 미국에서 보내온 1970년대 허드슨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있다. 그녀는 미국 생활 초기 동부에 정착했었는 듯하다.

 

방송반이었던 지영은 말을 참 예쁘게 했다. 그리고 태도가 우아했다. 한번은 담임선생님이 ‘재일교포 학생들이 고국방문’을 했는데, 숙박을 제공해줄 학급 내의 지원자를 찾았다. 아무도 자원하지 않자, 선생님은 지영을 지명했다. 그러나 지영은 선생님께 따로 찾아가 집에 사정이 있어 곤란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나중에 학교 가까이에 있던 지영의 집에 가보았는데, 지영이네는 미국 행을 앞두고 살림을 최대로 줄여 집안이 매우 단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방안에는 아담한 오래된 장식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덕혜옹주가 쓰던 장이며, 몇 대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높은 벼슬을 했다고 한다.


그 친구집은 6•25 때는 충청도에 있었는데, 인민군 아저씨가 자기네 집 툇마루에 와서 어린이에게 노래도 가르쳐 주고 했다고 한다. 그 시절 70년대, 공산당은 뿔이 났다고 해도 믿을 엄혹한 시대였다. 나로서는 지영이의 이야기가 내 생각의 범위에서 너무 동떨어져 지영이가 뭔가 허풍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 둘은 급우이긴 하지만, 그 시절 가족마다 배경이나 사정이 서로 많이들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도 지영과 나는 같이 공연을 직접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문화 애호가로서의 어떤 공통점이 있었던 듯 한동안 같이 다녔다. 그녀가 오랜 수속을 거쳐 미국에 간 이후에도 우리는 상당 기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결국 연락이 끊겼다. 아마도 그녀는 순조롭게 미국생활에 적응하면서 코리안 아메리칸 이민자로서의 생활에 깊게 들어가는 단계를 밟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월간 ‘샘터’는 폐간 위기를 넘기고, 독자와 기업의 후원으로, 2020년 4월 창간 50주년, 통권 602호를 발행하였다. 없어질 뻔했던 ‘샘터’가 다시 발간되는 것이 다행이다 느껴져 나도 오랜만에 샘터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정기구독 신청을 하였다. 20년 전 인터넷 초창기 샘터 홈페이지에 접속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들어 둔 아이디가 지금도 유효하니 옛 열쇠가 맞은 듯 감회가 든다.


35년간 소설 ‘가족’을 연재했던 최인호(1945~2013) 작가의 글은 이제 없지만, 그리고 김수근(1931~1986) 건축가가 1979년 설계한 혜화역 2번 출구 앞 대학로의 대표적인 붉은 벽돌 건물인  구 샘터 사옥에서 샘터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평범한 사람의 소소한 행복을 맛보고 싶은 독자들의 바람은 여전히 종이 책장을 넘기며, 사각사각, 청량한 샘터의 기운을 그리워하고 있다.


‘샘터’를 좋아했던 지영이도 혹시 미국에서 나처럼 이번 기회에 정기 구독을 신청하여, 한국으로부터 ‘샘터’를 계속 전달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영아! 이정자! 살아있으면 연락 부탁해!  


 

 

 

신순영

조이시애틀뉴스 서울통신원

고려대 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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