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한국의 수도이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서울을 떠나 시골에 고향을 가진 사람들을 동경하기도 한다. 서울에서 같은 유치원을 다닌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은 1984년 34년 만에 한국에 도착해서는 유치원친구 수필가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서울명동성당 앞에 있는 애국유치원을 단짝이 되어 다녔고 53세가 되어서 다시 만나 서로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백남준이 200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치원이란 지상의 낙원 같은 기억을 공유한 남녀로서 평행선 같은 우정을 유지하였다.
수필가 이경희씨는 백남준과 동갑으로 1932년 종로구 예지동에서 태어나 숙명여고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20년간 라디오방송의 스무고개와 재치문단 프로의 패널로 활동하였다. 1970년 첫 수필집 ‘산귀래’을 출간한 이래 여러 권의 수필집을 냈으며 가장 최근에는 2014년 이경희 수필선, ‘외로울땐 편지를’을 출간하였다. 1966년 마닐라를 시작으로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이미 1970년대에 남미, 유럽, 호주, 인도, 미국 등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거나 여행하였고 영문일간지 ‘The Korea Herald’ 에 3년간 매주 고정컬럼을 쓰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어릿광대’라는 이름의 꼭두극단(인형극단) 을 창단하여 한국전통 탈춤 ‘양주별산대’를 마리오네트(줄로 조종하는 인형극)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고 1984년 동독 드레스덴에서 한국 최초의 공산국가에서의 공연을 성사시키는 등 한국문화의 소개와 교류에 힘썼다. 여행이 그녀의 삶의 테마가 되어 기행수필’들을 발표했으며 요즘도 여러 지면에 못 다한 이야기의 수필들을 발표하고 있다.
1957년 오수인씨와 결혼, 7년 전 사별했으며 슬하에 4녀를 두었다. ‘백남준이야기’ (2000)로 현대수필문학상을, ‘이경희 기행수필’ (2009)로 조경희 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2015년 한국문인협회 ‘올해의 수필인 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숙명여고졸업 문인들의 모임인 숙란문인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이경희씨의 수많은 활동들과 약력 중에서 그냥 수필가가 아닌 기행수필가로서의 그녀의 이력이 매우 궁금했다. 어떻게 여행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선생은 올해 1월 서울을 떠나 경기도 용인에 있는 시니어들을 위한 삶터인 S 노블카운티로 옮겨 살고 계셨으며 인터뷰는 2015년 7월 9일 그 곳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꿈꾸지만 배우자와 아이들 때문에 그런 생각은 꿈으로만 지니고 환갑이 되어서나 해외여행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가정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오랜 기간을 혼자 꾸준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까?
- “이제 돌이켜보니 타고 났던 것 같습니다. 저의 사주에 역마살이 많은 모양입니다.(웃음)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해외여행이 금지된 시절 국제단체에 가입해서 회의참가를 이유로 기회만 있으면 다닌 거죠. 물론 가입한 국제회의에서 참석자로서의 역할을 철저히 완수해 가면서요. 그러니까 자꾸 또 기회가 생기게 되고요. 새로운 고장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여행을 통해 충족되는 것에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가정적으로는 남편의 허가와 아이들의 건강 만이 문제가 되는 요소였지요. 그 문제가 해결되고 집안이 나 없어도 생활이 되면 일을 만들어서 나가곤 했답니다. 여행비용은 제가 1970년대 남미 이민자들의 대상으로 크게 유행했던 미싱자수학원을 운영해서 스스로 조달했습니다. 요즘이야 누구나 해외여행을 갈 수 있으니 자신 스스로 여행을 계획해서 가면 되겠지요.”
선생님의 저서 중 하나인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 (2011)를 보면 그가 2006년 1월 타계하기 전 2004년 12월에 마이애미 자택을 방문하고 이어 쿠바여행을 하셨습니다. 그때 선생님 나이가 이미 한국나이로 74세 이셨습니다. 그러나 글에는 여전히 현역여행자의 솔직한 감수성과 당당한 행동반경이 느껴집니다. 그런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 “책에도 썼지만 백남준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을 기자를 통해서 알고 마이애미로 간 거죠. 그가 추천한 호텔에서 머물면서 예정대로 남준을 만나려 했지만 현지에서 연락이 잘 안돼서 포기했다가 극적으로 재회를 해서 강한 포옹으로,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고마운 마음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뜻 깊은 여행이 되었습니다. 그 여행일정에 포함된 쿠바는 내가 1974년 아이티 여행 때 못 가서 늘 마음 속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갔던 것이지요.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여서 가난하지만 남미 특유의 정서가 있어서 사람들의 행동에는 여유가 있고, 도시 곳곳에 흥겨운 춤과 음악이 있어 여행자의 마음을 마냥 즐겁게 해 주는 나라였습니다. 여행을 가능하게 한 힘이 무어냐고 굳이 답변을 해야 한다면 그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탓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겐 남보다 강했는지 모릅니다. 또한 그런 기회가 있으면 결단을 쉽게 내리는 이런 세가지라고 할까요.”
마지막 해외여행은 어디였으며 앞으로 여행 계획이 있는 지요? 여행이 종결되었다고 느끼신다면 마음은 있는데 육체적 한계일 뿐인지 여행에 대한 마음이 없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마음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나이에 혼자 예전 같이 간다는 생각은 안 하지요. 근년에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까운 일본을 일 년에 두 번 정도 다녀오고 있습니다. 지난 6월 현충일을 끼고 일본 시고쿠에 있는 마쓰야마에 다녀왔습니다. 그곳 도고온천에서 잘 쉬다 왔지요. 아이들과 같이 하는 여행은 아직은 할 수 있으니까요. 그저 그 정도죠 뭐. 딸들이 저이들끼리 얘기하는 것을 옆에서 듣기만 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오랜 시간 집필활동을 하셨는데 글은 어디서 주로 쓰십니까? 책에서 보면 사무실이야기가 나오는데 개인 집필사무실을 따로 가지고 활동하셨는지요?
-“특별히 집필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고 일상의 생활 공간 속에서 글을 씁니다. 예전에 다방에서 글을 쓴 일도 있었죠. 가족에게 글 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지요. 왠지 너무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는 것이 미안해서였어요. (방안에 책상을 가르키며)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백남준 책도 그랬고 지금은 저 책상에서 씁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면 모두 좋겠지만 노년은 자립할 힘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두려운 기간이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20년 전 생각하시던 80대와 실제 80대로서 살아보니 무엇이 가장 다릅니까? 혹은 같으신가요? 가장 힘든 점과 몰랐던 즐거움은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다른 점이라면 나이를 먹어보니 내가 이때까지 생각하는 게 다 옳지는 않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 할까요. 세상을 알고 깨닫는 게 있으니까 나이 먹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돌아보면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것을 다했고 이제 혜택 받은 것 들을 보답하는 일만 남았지만 그건 생각뿐이지 이젠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인생을 잘 마무리해야지요.”
1994년 11월부터 2007년 6월까지 12년 8개월 동안 월간 ‘춤’지에 기행수필을 쓰시고 그 중 53편을 선정해서 2009년 ‘이경희기행수필’ 을 내셨는데요, 그 기간 동안 정기적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신 것인가요? 어떻게 그렇게 기행수필을 오래 연재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수필들이 모두 여행지에서 얻은 주제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기행수필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일부러 가지는 않았습니다. 여행은 어느새 나의 삶의 테마가 되었고 여행가서 다른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강한 애정과 희열을 느꼈습니다. 긴 연재기간 동안 중간에 그만 두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독자에 대한 책임도 있고, 방송 활동할 때도 그랬지만 그만두겠다고 하다가도 다시 요청이 오면 마치 고향’ 에서 부르는 거 같이 좋아서 계속하게 된 것이지요.”
늘 여행을 허락해준 남편과 어머니의 정신세계를 존중해준 자녀 등 가족들에 대해 언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있다면 남편과의 성공적이 결혼생활이 아닐까 합니다. 남편은 나의 여행 스케줄을 미리 알고 내가 도착할 지역에 미리 나와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주기도 했고 호텔을 예약해서 여행 중간에 만나기도 했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나의 여행의 세세한 부분을 다 이야기 했답니다. 애들은 지금은 다 커서 중년이 되어서 서로 잘 대화하지만 큰 딸이 초등학교시절, 어버이날 쓴 편지에 ‘신문에 나오는 엄마보다 집에서 밥해주는 엄마가 좋다!’ 라고 해서 부끄럽기도 했죠. 딸의 공격에 대하여 ‘엄마의 답변’이란 글을 썼는데 그 글이 방송이 되었어요. 그 방송을 들은 어떤 분이 공감을 하고 비서를 시켜서 몽블랑만년필에 본인의 이름을 써서 보낸 일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두고 직장생활을 하는 가정에서는 다 공감 가는 얘기여서 그랬을 겁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향유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있는 현재 중년들에게 조언을 해주시면 합니다.
-“조언이라면 형식적이 되기 쉬운데… 모든 인생에는 각자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길을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 길 만이 자기가 타고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무엇이고 삶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는 별개가 아닙니다. 여행이 삶이고 삶이 여행이지요. 나에게 여행은 기회였기에 갔고 반성을 위해 간 것도 아닌데 일상을 떠나 혼자가 되면 비행기 위에서나 카페에서 우두커니 있게 되는 순간이면 가만히 현 상태를 분석하게 됩니다. 주로 잘못한 것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해답이 나오고 다음에 도움이 되죠. 그런데 다음에 또 실수를 할 수도 있죠. 삶을 투명하게 비춰보는데 크게 작용한 것이 여행과 글쓰기였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는 점심과 저녁을 먹고 중간에 다과를 먹으면서 계속되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경기도 낯선 동네에서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는 부담으로 부득이 그간 나온 대화를 생각해 보며 선생님의 배웅을 받고 서울로 향했다. 글과 인생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 가. 사람은 늙어도 글은 늘 신선하게 남아있고 또 새로운 독자를 만난다. 작가의 얼굴은 나이가 아니라 기억인 듯 수필가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에서는 그 시절 그 기억의 열기가 그득하다.
글/사진 = 신순영 조이시애틀뉴스 서울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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